<프롤로그> 오늘도 이별한다.
K는 오늘 이별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차가운 파랑의 이별을 했다. 이별은 아무 말 없이 K 옆에 걸터앉았다. 다시는 헤어짐 따위 없이 행복한 시간만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번에도 아니다”라는 식어 빠진 호떡 같은 눅눅한 절망뿐이다.
“모두 거짓말일 거야”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나비처럼 안고 살았던 지난날들. 돌아보니 그저 한철 피고 지나간 꽃 같은 시간이었다. K는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가 되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끔찍하다 못해 초라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가 텅 비었다. 수없이 많은 이별을 마주하며 살아왔지만, 매번 이 순간의 이별이 가장 슬프고 아프다. 그의 모든 것, 크고 작고, 아주 사소한 것들마저 K의 삶 속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하루아침의 모든 것이 꺼져버렸고, 온통 캄캄해졌다. 그를 마음속에서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일은 지난 시간을 다시 하나씩 기억해 내는 것보다 힘들었다.
아팠다. 언제 내게 처음으로 달콤하게 “사랑한다.” 말했는지, 다정한 일상은 언제부터 시작됐던 건지, 사랑했던 시간을 마음에서 없애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지나간 모든 것들이 등 뒤에서 K를 안았다. 자신을 붙잡는 기억을 떼어내며 “이제 다 끝난 일이야. 내 마음에서 지우면 돼”라며 오늘을 버텼다. 이별은 왜 꼭 이렇게 아픈 걸까. 이별은 한 번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아물지 않을 것 같은 생채기를 만든다. 시간은 흘러갔고, 아플 만큼 실컷 아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생각했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자”
어제가 가고 겨울이 왔다. 아무 감정도 없이 눈 위를 걸었다. 자유다. 발바닥이 아플 때까지 마음껏 걸었다. 지칠 때까지 발자국을 새겼다. 이제 슬프지 않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가고 있다. 코끝을 벌겋게 만들던 차가운 바람이 어느새 기분 좋게 사르르 뺨을 스치고 간다. 아지랑이가 춤을 추면 새싹들이 기지개를 켜듯 나온다. 나비 떼가 꽃을 기다리며 춤춘다. 멀리서 파란 하늘 위 뭉게구름이 손을 잡고 내 머리 위에서 포옹할 때쯤, 나는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꽃들의 반가운 몸짓을 느꼈다. 봄은 삭막한 바위 위에 이름 모를 들꽃을 피우게 한다. “사랑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를 들었다.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 라고 맹세했던 K는 어느새 그 목소리에 응답한다. “사랑해” 마치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것처럼, 이것이 나의 처음인 것처럼, 마지막인 것처럼, 고개를 들고 새로운 너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