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랑은 풍선껌 같아.
풍선껌을 씹었다. 달큰한 과일 맛이 침에 섞여 녹는다. 한참을 질겅질겅 껌을 씹다가 풍선을 불려고 껌을 부풀린다. 위이잉~하고 바람을 머금고 풍선이 불어진다. 풍선이 조금씩 커지고, 그만 불어야지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풍선이 탁~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터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터져버린 풍선껌은 휴지통에 버려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과일향기가 나던 알록달록 예쁜 빛깔의 풍선껌이었다는 사실은 잊힌 채, 그저 바람 빠지고 힘없이 늘어난, 향기 잃은 늙은 껌이다. 늙은 껌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거리에 떨어져도 여기저기 달라붙을 까봐 피하게 되는 애물단지를 버리려고 해도 종이에 싸서 들고 다니다가 쓰레기통을 찾아야 하는 수고가 필요한 골칫덩어리다. 풍선껌은 왜 풍선이 될 수는 없을까. 풍선이 되면 하늘로 높이 올라갈 수 있는데…. 끈적이는 마음은 아직도 미련이 많다. 풍선껌을 씹는다. 아까 씹었던 껌맛은 잊어버렸다. 새로운 향기가 입안을 맴돈다.
K는 풍선껌을 여러 개씩 갖고 다녔다. 언제고 씹고 싶을 때 꺼내어 먹을 수 있게. K에게 남자들은 그런 존재다. 풍선껌 같았다. 여러 개의 알록달록한 껌을 하나 집어 들어서, 풍선이 만들어질 때까지 씹었다. 그러다가 툭 하고 풍선이 망가지고 나면 그만이었다. 마음이 슬퍼지거나 휑한 기분이 들 때면 K는 풍선껌을 씹었다.
K에게도 방황의 시간은 있었다. 배가 고파도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배고픈 것이 귀찮았다.
“왜 인간은 배가 고파야 할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도 하고, 밥을 먹을까 말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면면한 시간을 보냈다. 달콤한 유혹은 이런 때 찾아온다. 풍선껌은 한 개씩 팔지 않았다. 선물세트처럼 여러 개가 같이 들어있었다. 방황하고 있던 K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A였다. A는 봄비가 내리던 4월에 만났다. K는 봄꽃을 닮은 연둣빛 트렌치 재킷을 입고 노란 우산을 쓰고 스쿨버스를 탔다. A는 그때 K를 처음 봤다고 했다. K는 A를 보지 못했다. A는 아주 천천히 K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3호선 환승역에 서 있으면 A가 저 만치서 보였다. 한두 번은 우연인가 했다. 어떻게 환승역에서 1호선 기차를 타려고 하면 저 아이가 나타나지? 얼마 후 A는 K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이미 환승역에서 여러 번 마주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A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줬다. 사실은 K가 지하철을 타는 시간을 기억했다가 마치 우연히 만난 것처럼 옆 칸에서 숨어 있다가 시간에 맞춰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그런 얘기를 꺼내 놓은 지 며칠 후, 선물과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내가 번 돈으로 산거야.”
포장을 뜯어보니까 윤종신의 “환생” 테이프와 꽃다발이었다. 그런데 환생 테이프 가사 곳곳에 빨간색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건 뭐야?”
“내 마음과 같은 부분은 밑줄 그었어."
A는 벌게진 얼굴로 달아나듯 사라졌다. 이렇게 고백까지 했지만 A는 다른 남자들처럼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K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종종 이런 문자를 보냈다.
“오늘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괜찮니?”
“집에 돌아가는 길이 지루하면 3호선 같이 타줄까?”
K는 A가 만들어주는 적당한 간격이 좋았다. 한편으론 자신도 A와 같은 마음이 아니란 것이,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번 부풀면 줄어들지 않고 풍선껌처럼 A의 사랑은 점점 더 커졌고, K가 느낀 미안한 마음도 동시에 점점 커졌다. 결국 미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K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날 사랑해 주는 마음이 너무 고마운데 너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서 마음이 아파.”
K의 말에 A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K를 바라봤다. A의 순애보 같은 사랑은 11년이 조금 지나서 끝이 났다. A는 정말 K가 이슬만 먹고 산다고 믿었다. A에게 K는 공주님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A를 지켜보기가 도저히 힘들어져 K는 A를 불렀고, 소주 석 잔을 마신 K는 A에게 Y얘기를 꺼냈다.
“나에게도 이루지 못하고 가슴만 아픈 사랑이 있어. 지금의 네 감정이 이해 돼.”
이런 K의 말이 A에게 독이 된 걸까. A는 그날 이후 다시는 K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관심 없던 A가 막상 자신 곁을 떠나자 얼마 동안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허전함은 미련이나 아쉬움의 감정이 아닌 미안한 마음이었다.
A가 떠나고 나서 얼마 후, K는 아는 동생에게서 T를 소개받았다. T는 어린 나이에 회계사에 합격했다. M오빠말로는 T는 자기가 아는 모든 친구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제일 멋진 친구라고 했다. 이 친구면 네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M오빠 말대로 T는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다방면으로 박학다식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문학을 했으며, 웬만한 철학사상은 다 꿰고 있었고,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회계사가 된 그는 회계법인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이런 그가 K에게 한눈에 반했다며 그 길로 그는 K와 만나고 싶어 했다.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T였다. 그런데 모두에게 완벽해 보이는 T가 웬일인지 뭔가 2% 부족했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는 K의 마음을 움직이질 못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T는 만날 때마다 이벤트를 준비해 왔다. 예쁜 화분을 사 오고, 사탕 꽃다발을 만들어오고, K를 위해 당일치기로 벚꽃 구경, 바다여행도 계획했다. 그런데도 K는 자신의 마음이 뭔지 이해가 안 됐다. 그가 준비한 많은 이벤트에 응해 주긴 했지만 그다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T는 K에게 스케이트를 타러 가자고 했다. 당연히 K가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할 거란 예상을 한 거다.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하면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이거다. 애석하게도 K는 스케이트를 잘 탔다. 너무 잘 타서 학교에서 선수생활을 했을 정도다. 뭔가 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되자 T는 K에게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며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설마 장난 같은 걸치진 않겠지. K는 재차 다짐을 받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몇 초도 안 되는 사이 T가 뽀뽀를 했다. K는 너무 화가 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장난 따위 하려고 눈감으라고 한 거예요?”
뭔가 대답을 하려는 T를 뒤로 하고 K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K의 불분명한 태도에 T도 지쳤다. K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T는 K가 한다는 인터넷 고스톱에도 가입을 했다. K와 상대해 주기 위해서다. K는 고스톱을 칠 줄 몰랐지만 컴퓨터가 시키는 대로 짝 맞추기를 하면 재미있었다. 상대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걸 해준 것이 바로 T였다. 야근까지 하고 와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T는 K를 위해서 고스톱을 쳤다. 이런 지지부진한 것까지 감수하면서 K곁에 있고 싶어 했던 T를 그깟 뽀뽀 한 번에 손을 놔 버린 K는 어느새 “나쁜 여자”가 되어 있었다. K가 손을 놓은 것은 뽀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T와 한 것들을 K도 몹시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분명 누군가와 하고 싶었던 일인데 막상 T와 하면 즐겁지가 않았다. K는 스케이트를 타고 싶었지만 T와 타고 싶지 않았다. K는 어떻게든 즐거워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그게 안 됐다. T에게 마지막을 얘기하면서 K는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당신이 내게 만들어준 행복한 기억들은 잊지 못할 것” 이라고.
풍선껌 하나가 또 터져버렸다. K는 다시 풍선껌을 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예상치 않은 뜻밖의 사건이 터질 때가 있다. K는 일 때문에 싱가포르에 가야 했다. 일종의 비즈니스 트립인데 싱가포르에 인맥이 필요했다. 운 좋게 싱가포르 현지인을 소개받은 K는 여행 전에 L과 이메일로 몇 번 여행 일정에 대해 얘길 나눴다. 그리고 도착한 싱가포르, L이 공항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수더분하고 선해 보이는 작은 키의 L은 이메일 속 편지의 말투와 그대로 닮아 있었다. L은 싱가포르의 역사와 문화, 예술 등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줬다. K는 마치 수업을 듣는 것처럼 열심히 메모까지 하면서 들었다. 일정 내내 L은 자신의 일도 미룬 채 K의 일을 도와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K를 싱가포르의 맛집들로 데리고 갔다. L이 조금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같았지만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 부담 갖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싱가포르를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L은 조금씩 초조해 보였다. K에게 떠나기 전날 할 말이 있다면서 L은 K를 호텔 로비 바로 불러냈다. K는 며칠 전부터 예감하고 있던 일이었다. 아무리 일을 도와준다고 해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의 일까지 뒤로 미루고 매일 와서 K의 일을 돕는 L이 K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K를 부른 L은
“처음 만날 때부터 좋아했었어요.”
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K는 이제 그만, 그만 얘기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L은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록 일을 도왔던 거지만 함께 있으면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며 L은 K의 손을 잡았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준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됐다. K는 정중히 L의 손을 빼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이 없어요.”
그러자 L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대답했다.
“친구가 되면 되잖아요. 난 친구 하고 싶은데.”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K도 외로웠다. 그 누구라도 나에게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고, 그 어디에라도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이기적인 줄 알면서도 K는 L의 부탁을 들어줬다. 집으로 돌아온 K는 그날부터 싱가포르에 친구가 생겼다. 그는 아침이고 저녁이고 전화했다. K도 시시콜콜한 일들부터 어려운 일들까지 자질구레한 모든 이야기들을 L에게 했다. K와 L의 행동은 얼핏 보면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연인의 모습 같았지만 그들에게 빠진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이들의 관계는 반년이 넘게 이어졌다. 지고지순한 L의 노력 때문이었다. 어쩌면 L은 K와 계속 연락하다 보면 K의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K와의 관계를 아무 불평 없이 이어갔는지도.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늘 K의 마음이 문제였다.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인 둘의 관계에 K는 어느덧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L의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항상 핑곗거리가 있었다. L은 K의 거짓말을 믿는 건지 아니면 믿는 척하는 것인 것 K가 하자는 대로 모두 받아들였다. 결국 K는 학업을 핑계로 L에게 그만 전화하라고 했다. L은 아무 힘이 없었다. 그저 K의 말에 수긍하는 수밖에는.
풍선껌은 이미 오래전에 퍽~하고 터졌다. 터진 지 오래인 풍선껌을 K는 버리지 못했다. K에게 L은 수호천사 같은 남자였다. 무슨 일이 생겨도 어디에 있어도 달려와줄 것 같은 수호천사. 항상 불안한 마음과 수많은 걱정들을 안고 있었던 K에게 L은 어떤 얘기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K를 다독여줬다. 하지만 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K에게 풍선껌이었다. 따뜻한 L의 마음 때문에 K는 이미 생명력을 잃은 풍선껌을 한 손에 쥔 채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달콤한 풍선껌이 많이 등장했다. 어떤 때는 단 하루 만에도 풍선이 터져버렸고, 또 어떤 때는 풍선조차 불지 못하고, 향기도 내보지 못한 채 찌그러져 버린 껌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너무나 예쁜 풍선을 불었으나 찰나의 시간을 남긴 채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K에게 달콤한 풍선껌이었던 것처럼 K 역시도 그들의 풍선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 곁에서 진짜 풍선은 되어주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풍선껌에 불과하단 걸. K는 뜨거운 사랑을 마음껏 받고 자랐다. 그리고 이제 아무런 후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