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아델
1/3 정도 읽다가 화가 나서 덮어버렸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버젓이 책표지에 적어놓고 도대체 사랑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언젠가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상한 여자가 이상한 행동만 하지를 않는가. 맞다 그 영화! 언젠가 보았던. 마치 진흙 구덩이에 신발이 빠져 꺼냈는데 빨아도 진흙 자국이 없어지지 않던 그 느낌의 영화. 안젤리나 졸리 초기작 <지아>
언제 보았는지 그 시기는 희미하지만 영화 줄거리와 강렬했던 그녀의 눈빛은 선명하다. 찾아보니 정말 아델과 지아는 닮아있구나 싶었고 나의 기억력에 내심 뿌듯해하며 박수를 보냈다.
보리수를 심고, 썩어 들어가는 이끼에 뒤덮이든 무심히 놔둘 벤치가 어울리는 아담한 테라스가 특히 그렇다. 파리에서 먼 곳, 지방 도시의 작은 집에서, 아델은 그녀가 정말로 정의했던, 그녀의 진정한 존재를 포기할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그 존재는 그녀의 가장 큰 시련이 된다. 그녀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그 존재를 버리면서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본질도 이면도 없는 표면, 그림자 없는 육신,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생각하지. 이러나저러나 모르는 건 마찬가지니까.’
P170
화가 좀 나더라도 끝까지 읽어봐야 확실히 화를내든지 하니까 페이지를 넘기다가 단숨에 끝까지 보게 된 이 책. 도대체 이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어째서 이렇게 멋진 문장들과 계속해서 공감의 ‘아~’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것인지 너무 궁금해졌다. 1981년 모로코 출생 레일라 슬리마니(Leila Slimani)는 고등학교 졸업 후 프랑스로 건너와 파리3대학에서 공부했다. 2008년부터는 아프리카 시사주간지 '죈 아프리크'에서 일하며 창작 활동을 해왔는데 기자활동을 통하여 <그녀, 아델>의 주인공을 그려냈다고 한다.
아델은 님포매니악(nymphomaniac) 환자이다. 우리말로 찾아보니 여자 색전증 환자라고 해석된다. 중독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내가 통제할 수 없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중독의 상태에 빠지게 되면 결국 죽음 만이 답인 것일까? 그러나 아델은 죽음을 극히 두려워하고 오히려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는 그 상황에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자신을 발견한다. 누가 봐도 좋은 남편에 능력 있는 워킹맘 으로서 삶은 그저 껍데기일 뿐 진정한 자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길을 잃고 헤매는 그녀. 자신의 머리칼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 로렌의 애인까지 아델은 욕망의 도구로 사용해 버렸다. 그래 그런 것이다 그 중독 이란 것은 자신이 죽어가는 것도 모른 채 순간순간 채우고 비우고 그렇게 나아가는 것.
끝까지 읽어봐도 정확한 원인은 찾지 못하겠다. 아델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어머니의 외도, 아버지의 무기력함, 둘의 불화, 그녀가 은밀히 읽었던 이 소설 때문인지.
어지러움, 그것은 쓰러지는 것과는 또 다른 두려움이다. 우리를 유인하고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것은 우리 안 깊은 곳의 텅 빈 목소리, 이윽고 두려움으로 떨쳐내는 추락의 열망이다. 어지럽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유약함에 취한다는 말.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유악함을 알고 거기에 저항 없이 빠져 들어간다. 유약함에 취한 우리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유약해져 만인이 지켜보는 거리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 한다. 바닥에, 아니 바닥보다 더 낮은 곳으로 임하고 싶어 한다. -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
적당히 타협하고 남의 시선 의식하고 내가 아닌 나를 조금 눈감아 주고 불편하고 내키지 않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 내가 조금 희생하고 상대가 상처 입을까 바로잡아주고 싶지만 그냥 지나치고 내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사랑을 구걸하지 않고 외롭지만 살아간다. 나도 당신도.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경계한다. 자신을 보살피고 있는 이에게 마음을 털어놓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푹 젖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 데 남은 힘을 쥐어짠다. 입을 열지 말라. 무엇보다, 입을 열지 말라.
P111
이 가을 열정적인 로맨스 소설을 읽고 싶어 펼쳐본 이 책은 나의 가슴속 일렁이던 작은 불씨마저 차가운 물을 끼얹어 없애 버렸다. 이윽고 진정한 나를 되돌아 보고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 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의 나는 누가 될 것인가? 나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현재와 미래에 어떤 것이 최선인가? 수없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독서의 순기능인가 역기능인가. 몰랐으면 행복했을까?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삶이 녹아있는 소설입니다. 생동감 있는 삶이 녹아있어 생물계처럼 유기체로 존재하는 소설이지요. 특히 등장인물 같은 경우엔 그 나름대로 존재의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소설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원하지 않아도 밀어붙이는 삶의 속성이 녹아있는 소설이 좋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나에게 정말 좋은 소설이다. 아델을 통해 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결혼생활도 되돌아 보고 아델과 남편의 입장도 헤아려보고 새로운 문장과 사실들과 빠른 전개로 단숨에 읽었지만 그 이후 생각의 시간들은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다. 무엇보다 아델의 이야기만이 아닌 남편인 리샤르의 이야기도 담겨있어 그녀의 삶이 또 그의 삶이 양쪽 다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고 깊은 성찰의 시간을 나에게 준 것 같다.
의견을 내지 않을 거면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해 반대하지도 마.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왜 그런식으로 행동하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어. 곤드레 만드레 취해서는 마치 자기는 인생만사를 다 이해한다는 듯 사람들한테 큰 소리로 떠들고, 당신 눈엔 다른 사람들이 전부 어리석은 양때로 보이나 보지? 아델, 그거 알아? 당신도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언젠가 당신이 그걸 인정하는 날 좀 더 행보해질 거라고 생각해.
P84
남편이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아델은 몸을 돌린다. 너무나 약해 보이는 방, 살며시 흔들리는 침대 속의 그를 바라본다. 그 어떤 동작도 이제는 순수할 수가 없다. 아델은 그에게서 공포를, 동시에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P224
결혼과 출산과 육아 일에 사랑과 행복이 있을 때 부담과 공포도 함께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껍데기는 사랑과 행복만이 가득하게 보이도록 애쓰지만 나를 바라보고 기대오는 자녀들과 안정을 요구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를 누르는 부담감, 그리고 그들이 불안정한 나로 인해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 나뿐만 아니라 나의 남편 나의 자녀들도 겪고 있고 앞으로 겪을 감정들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표지에 눈에 띄게 적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결국엔 나를 찾고 나를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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