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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 Oct 12. 2019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1993년, 아빠는 무역 회사를 퇴직하고

신당역 4번 출구 골목에 있는
5평짜리 비디오 가게를 인수다. 

비디오들은 마다 책처럼 층층이 꽂

천장까지 붙을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가게에는 사한 자동차 모양의 테이프 리와인더 두 대,

레코더 기능이 있는 비디오 기계도  대나 있었다.  

아빠는 누구한테 얻다는 뚱뚱한 사각 컴퓨터를

카운터 위에 두었다.
단 한 번도 컴퓨터 모니터가 켜진 것을 보진 못했지만...

늘 그 자리에 두고 매일 먼지를 닦았다.

그는 직접 르고 줄을 그어가며 만든

대여 리스트 종이2,300개의 비디오 케이스 안에

일일이 넣었다. 휴일인 일요일에도 가게 앞에 세워진

대여 반납함을 비우러 나갔고

그때 손님이 오면

반쯤 내려진 가게 셔터가 위로 끽끽 올라갔다.


나도 나름 열심히 도왔다.
대여 나간 비디오 케이스는 거꾸로 진열을 하는
손님이 꺼내 보다가 원상태로 해두면 

내가 잽싸게 의자를 밟고 올라가 다시 뒤집어 놨다.
테이프 감는 건 눈감고도 했고
클리너 용액을 묻힌 클리너 테이프로

비디오 기계 청소도 자주 해주고
드래곤볼, 란마 1/2 같은 만화 시리즈의 케이스와

비디오의 넘버가 잘못 들어간 건 없는지 체크했다.

우리 비디오 가게 단골 중에는 같은 반 남자애가

있었. 그 친구는 항상 다 본 테이프를 앞으로

되감 서 내게 자동차를 열고 닫는

재미를 주지 않았다.

아빠가 천천히 고 가져도 괜찮댔는데

꼭 하루 만에 반납하러 왔다. 

숫기가 없는 친군데 아빠한테  싹싹했고

내가 정말 재밌다고 추천했던 '바우와우' 만화

비디오를 매일 하나씩 전편을 빌려갔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나를? 아님 

아빠를 무척 아했던 것 같다.

아빠가 비디오 가게 인수 당시 권리금

2,300개의 비디오가 전부 포함이었다.
그런데 전 주인이 이소룡과 성룡이 나오는

유명한 영화들은 비디오만 쏙 빼서 팔아먹고
빈 케이스로만 숫자를 채워놨다며 

노발대발했던 기억이 난다.


“이소룡 영화 없어요?”
“성룡은 왜 없어요?” 란 소리를 열 번쯤 들었을 때  
그는 청계천 고가 다리 밑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빈 케이스를 하나둘씩 채웠다.

이소룡 작품의 ‘용쟁호투’와 ‘정무문’

비디오 원본을 찾아냈을 때
복권 당첨 4등이 되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지은 것을 잊지 못한다.
이건 상태가 A급이라 천 원은 더 받아야 된다는

아저씨와 다리가 아플 때까지 흥정을 했고,  

얼른 가게에 가서 필름이 흔들리거나
씹힌 곳이 있는지 틀어 봐야겠다고 성큼거렸다.   

만약 씹힌 부분이 있어도 아빠는 필름의 양쪽을 잘라서

명 스티커 밴드로 이어 붙이는 수술을 잘했기에

걱정이 없었다.
  
어느 날은 비디오 유통 회사의 영업하는 아저씨가

가방에서 비디오 하나를 꺼내며
제대로 된 물건 하나가 왔다는 야심 찬 표정을 지었다.
‘마스크’라는 대박 영화의 비디오니까 3개나

매입하라고 강추했다.
아빠는 샛노란 양복에 형광 애벌레 같은 '캐리'

얼굴을 앞뒤로 보고 또 보았다.
(이후 ‘덤 앤 더머’와 ‘에이스 벤츄라’ 비디오를

매입할 때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디오 가게 집 딸에게 인기 영화란
인기가 빠질 때 볼 수 있는 영화.

살짝 김 빠진 사이다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나는 원 끝나면 곧장 가게 갔다.
랜덤으로 비디오를 뽑아 케이스의 카피를 읽어 보고
어떤 내용일지 상상하는 것을 놀이처럼 즐

15세 관람 정도는 몇 해 일찍 도 혼나지 않았다.


영화 ‘세븐’의 브래드 피트 얼굴에서

진정한 잘생김을 배웠고
'천장지구 2'의 ‘너라면 죽어도 좋아’라는 카피와
세상 혼자 살 것 같은 곽부성의 얼굴과 눈빛.

'중경삼림'의 그 묘한 분위기와 음악은 나에게

홍콩이란 나라에 가보지 못한 그리움을 선물했다.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13일의 금요일에 '13일의 금요일' 비디오를

빌려가던 미스터리한 가족과

'배트맨'과 '슈퍼맨'을 놓고

말다툼을 하던 중학오빠들.

올 때마다 지루해 보이는 영화들만 한 번에

5~6개씩 빌려가는 양복 입은 아저씨.

후레시맨 비디오를 친구한테 빌려줬는데

친구가 이틀 동안 학교로 안 가져온다고

매우 억울해하던 남자아이.

한 번은 고등학교 언니들이 우르르 와서 고른

비디오 세 개 중 한 개가 '연인'이란 비디오였는데

아빠가 이건 야한거라 안된다며 단호하게 뺏자

언니 중에 하나가

"분명 연인.. 연인이 들어간 비디오였는데 아~헷갈리네~~"

라고 했다.

아빠는 "아! 이거 최근에 들어온 거. 이거 맞지?"

하고 확신 있게 웃으면서 내밀었다.  

언니들은 그렇게 '불멸의 연인'이란 제목의

고뇌하는 '베토벤' 얼굴이 크게 들어간 포스터까지 받아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아빠는 재밌는 영화를 추천해달라던

노처녀 언에게 '보디가드'를 추천해줬고,

취업 준비 중인 대학생 오빠에게는

'쇼생크 탈출'을 추천해줬다.


조그만 가게 안에는 시선이 멈칫하는

일명 '무언의 벽'이 있었다.

애마부인 시리즈들이 쭉 꽂혀있는 시뻘건 칸.
아빠가 나에게 가게를 맡기고 화장실을 가기라도 하면
빨간 칸 앞에 서있는 손님을 보는 내 눈은

갈 곳을 잃는다.
그 손님이 내게 그 테이프를 내밀어 달라고 하기 전에 빨리 아빠가 와야 한다..
'엇?' 아빠인 줄 알고 반가워했는데 손님이다.

이 손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영웅본색'

바로 집더니 원래 가게 안에 있던 손님 옆에 다.

적이 흐른다.

원래 있던 손님이 비디오를 꺼냈다 넣다를 반복하자

새 손님이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며 몇 마디 주고받는다.

그러더니 서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추천을 한다.
휴... 말벗이 생겨 정말 다행이다.

몇 해가 더 지나 동공의 떨림이 강진에서 약진으로

바뀔 때쯤  난 이 빨간 띠가 둘러진 플라스틱 책 제목의

패러디 위트에 혀를 내두른다.
 
젖소부인 바람났네
물소 부인 물올랐네 
만두부인 속 터졌네 

연필부인 흑심 품었네
꽈배기 부인 몸풀렸네


 당시의 비디오들은 영화 시작 전 

빨리 감기 버튼을 부르는 무시무시한 영상이 있었다.

불법 복제 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자막과

청소년 시청 불가 비디오에 대한 경고 영상인데

공사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 셋, 칼을 든 손,

무당이 굿을 하는 장면, 여인이 나체로 돌아보는 장면 등이 만화로 담겨 있었다.

초록 딱지는 청소년용, 빨간딱지는 성인용이라고도

친절히 알려줬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법 비디오들을

시청함에 따라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수한 영상매체를 비디오를 바르게 선택 활용하여
맑고 바른 심성을 가꾸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길잡이가 됩시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1993년, 비디오 가게 집 딸이었던 현대의 어린이가
2019년, 현대의 어른이 되어 신당역 4번 출구를

지나가다 오래된 추억의 비디오 한 편을 틀었다.  


난 8년간 비디오 가게 집 딸래미였다.

인근에는 책,만화책,잡지까지 렌탈하

대형 비디오 가게도 있었는데 아빠 가게와 그 가게 모두 2002년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빠의 비디오 가게는 몇 가게를 거

현재 순댓국집으로 바뀌 있었다.

커다란 들통 위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 작은 공간에서 아빠와 돈가스도 시켜 먹고 

카운터에 앉아 학원 숙제를 하기도 했었지..


펄펄 우려지는 순댓국 육수처럼

내 기억도 이곳에서 끝없이 우려진다.


맞다! 비밀의 공간!! 그곳이 떠올랐다.

갑자기 상기된 표정으로 밖에서 훤히 보이는

순댓국집 주방 바닥을 기웃거렸다.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는데 한그릇 먹겠냐는 표정이다.

깜짝 놀라 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가게 아래에는 겨진 지하 창고가 있었다.

카운터 뒤 바닥무거운 나무 이 있었고

그걸 열면 성인 한 명이 겨우 내려갈 틈으로

오래된 나무로 들어 진 사다리가 내려져 있다.


사다리를 타고 중간쯤 내려와 허공에 손을 저어

느슨하게 매달린 전구를 찾아 돌려 킨다.

2평 남짓한 공간,

탑처럼 쌓인 비디오테이프들과

무겁게 돌돌 말린 영화 포스터들이 보인다.

아빠 '찾았어?' 하는 목소리가 울렸던 그곳에는

퀴퀴하고 축축한 종이 냄새와

붉게 일렁이던 먼지들이 있었다.

"앗싸 찾았다 아빠!!"


하나밖에 없던 '토이스토리' 비디오

가게에서  틀고 보다가 손님이 찾아 30분 만에 

급하게 빼줬던 기억도 났다.

 '내가 나중에 그걸 끝까지 봤나?'


영화 '비트' 비디오는 내가 아빠한테 당당하게

돈 주고 빌려와 친구들이랑 같이 봤었는데..

'그때 우리 집에 누구누구가 왔었더라...'


사람들에게 취미가 무엇이냐 물으면 

'영화보기' 란 말보다  '비디오 보기'라는

대답이 많았던 시절.

나의 추억 필름이 뿌져서

앞으로도 뒤로도 찬찬히 돌려본다.

앗! 지금 이럴 때 마법의 클리너 테이프가 필요한데...’

금세 화면이 선명해지는 클리너 테이프를
머릿속에 넣고 재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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