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자기앞의 생>을 읽고...
이 글은 2월에 참여하고 있는 숭례문학당 독후감쓰기 3주차 독후감입니다.
이 책은 내가 골랐다면 읽을 확율 0%의 소설입니다. 이유는 슬픈 소설이니까요..
난 요즘 해피엔딩 아닌 소설, 영화는 절대. 안 보니까요..
그리고, 간만에 처음으로 '이성'이 아닌 '감성'의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_^
"책을 읽다가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친한 회사 후배가 어느 날 이런 얘기를 하면서 한권의 책을 추천했다. 난 속으로 도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눈물을 펑펑 흘릴 정도일까 궁금했지만, 그 때는 그 책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 후배의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이번에. 독후감쓰기 모임 덕택에.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묘한 인연이다.
이 소설은 14살 소년 모모와 68세 로자 아줌마에 대한 얘기이다. 모모는 어린 시절 로자 아줌마한테 맡겨져 자랐다. 로자 아줌마는 이처럼 부모로부터 양육비를 받아 아이들을 대신 키워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로자 아줌마들이 키우는 아이들은 창녀의 아이들로 정식 제도에 편입되지 못하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런 아이들 중에. 모모는 가장 오랫동안 로자 아줌마와 지내고 있는 큰 형 같은 아이이다.
인생은 이런 그들의 삶이 그럭저럭 흘러하게 놔두지 않는다. 인생은 언제나 돈과 건강이 문제이지 않은가?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지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그녀는 나이 들어가면 아프게 된다. 이제 슬픈 일들만 그들의 삶에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상황이다.
난 소설을 읽으며 궁금했다. 작가가 이 뻔하디 뻔한 슬픈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갈지 말이다. 주인공 두명 모두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아닌가? 로자 아줌마는 곧 죽을 것이고, 고아인 모모는 홀로 남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작가가 결말에 기적을 남겨 놓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예를 들어, 갑자기 사회복지시스템이 좋아져서 소외된 이들이 보통 사람처럼 교육받고 먹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던가.. 아니면, 어떤 독지가 또는 사라졌던 모모의 부모가 부자가 되어 나타나 이들을 불행에서 건져올려 주던가 말이다.
그러나, 이런 기적은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기적은 한국의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닌가? 진지함으로 가득찼을 1970년대 프랑스 소설가가 이런 허망한 해피엔딩을 쓰지는 아닐 테니 말이다. 역시나 소설의 결말은 우리 모두가 예상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로자 아줌마는 죽을 것이고, 모모는 홀로 남겨질 것이다.
난 2~3년전부터 영화, 소설, 드라마를 선택할 때 한가지 기준을 세웠다. 간단하다. 해피엔딩이냐 아니냐.. 해피엔딩이 아니면 아무리 내용이 좋고 잘 만들어졌다고 해도 내 위시 리스트에 넣지 않았다. 예를 들어, '7번방의 기적'이란 영화가 있었다. 사람들이 펑펑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영화 말이다. 난 안 봤다. 행복을 꿈꾸기만도 힘든데 그 슬픈 상황에 굳이 나를 밀어넣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나도 안다. 이 소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런 슬픈 일들은 내 현재 삶에 있을 것이고, 앞으로의 삶에 닥칠 것이다. 그렇지만, 난 그 불행을 최대한 외면하고 싶다. 그래서, 해피엔딩 스토리만 읽고 본다. 아니면, SF 영화로 숨어서 현재의 나를 잊고자 한다.
결국 소설에서 로자 아줌마는 죽음을 맞이하고 14살 모모는 홀로 남겨진다. 모모가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는 시간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내 마음 속에는 '슬픔'보다는 '따스함'이 피어나 있었다. 누가 켰는지 모를 따스한 촛불 하나가 내 마음 속에 켜졌다.
왜 이 촛불이 켜졌을까?
상투적으로 말하면, 이 팍팍한 세상에 그래도 사랑이 있어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마음이 있어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