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지적질 대마왕이다!
[내가 MBA에서 배운 한가지 #4] '데블스 에드버킷
1.
오늘 팀회의에서도 참지 못하고 지적질을 마구 해댔다. 왜 그랬나 싶다. 내 회사도 아닌 그들의 회사인데, 뭐하러 내 기분 나뻐하면서 지적질을 했을까 말이다.
나도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렇게 심하게 지적질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A를 A-1와 A-2로 세분화하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상대 팀원이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폭발했다.
따따따따따따따따~~
수정이 필요하고 고민이 필요한 항목들을 마구 쏟아냈다.
결국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산으로 가버린 채 끝났다. ㅠㅠㅠ
2.
내 MBTI 유형은 INFJ다. 그런데, 기분 나쁠 때는 ISTJ로 '흑화'한다. S(감각향)의 꼼꼼한 센싱 능력과 T (사고형)의 냉혹한 틀린 그림 찾기 능력을 결합하여, 슈퍼맨급 지적질 대마왕 모습으로 행동한다. 그 흑화 순간을 나도 느끼지만, 멈추지 못한다. 이미 짜증났기 때문이다.
내가 '흑화'하는 티핑포인트는 2가지 경우다. 첫째, 신체적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며칠 잠을 숙면을 못 한 경우에 그렇다. 둘째, 마음에 짜증이 생겼을 경우다. 내가 원하는 뭔가가 안되거나, 타인들이 일을 못 해서 나에게 그 영향이 밀려올 때이다.
여하튼 가끔씩 ISTJ로 '흑화'하여 '폭주'하면 팀원들과의 관계는 껄끄러워진다. 그런데, 재밋은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이럴 때마다 팀장은 "좋은 지적 포인트야. 이런 관점에서 보완해 보자고."라고 좋아한다. 내가 왜 내 기분 망치면서, 다른 사람 기분 좋은 일을 해야 하는 걸까?
3.
그런데, MBA에서 '의사결정론'을 배울 때 나오는 방법론 중의 하나가 '데블스 에드버킷 (악마의 변호인)'이다. 용어는 어려운 데, 쉽게 말하면 '지정 지적질러'라고 생각하면 된다. 회의를 할 때, 앞에서 말한 흑화된 나같은 역할을 한 사람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회의에서 주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계속 내놔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의사결정 오류에 빠지는 것을 그래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현실에서 가능햐냐는 이슈는 글쎄...)
'데블스 에드버킷'은 악마의 변호인이란 의미이다. 카톨릭 성인 추대 심사에서 후보자의 단점만 얘기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을 '데빌(악마)'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된 용어라고 한다.
왜 데블스 에드버킷이라는 '지적질 역할'이 필요할까?
어떤 회의든지 주류와 비주류가 있기 마련니다.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주류 의견 대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멤버 중에 주류 의견의 오류를 파악한 비주류 사람이 있다라고 가정해보자. 그 비주류 사람이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지적질 대마왕'으로 찍힐 가능성이 있고, 주류의 반대 공격에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당하게 소수 반대 의견을 편하게 낼 수 있도록 미리 '데블스 에드버킷'을 정해 놓는 셈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반대 의견을 내도, 주류 멤버들은 그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부여된 역할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실제 회사에서 '데블스 에드버킷'을 본 적은 없다. 즉, MBA 교과서에만 존재하는 방법론이다. MBA에서 이것을 배운 많은 리더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실제로는 2가지 변형된 형태로 현실에서 사용하는 듯 하다.
첫째는 나같은 '지절질 대마왕'이 진짜 존재하는 경우다.
둘째는 CEO 지원 조직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다.
CEO 지원 조직에서 주류 의견에 반대되는 검토 의견을 보고하면, CEO가 그 의견을 말한다. CEO가 말하기 때문에 다른 임원들이 그것을 무시하지 못한다. 이렇게 현실판 '데블스 에드버킷'은 운영되는 듯 하다.
5.
여하튼 나는 '지적질 대마왕'으로 흑화하지 않으려 한다. 남의 일을 굳이 내가 딴지 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지적질은 팀장 같은 직책자의 역할이니까. 내가 동료들과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내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지적질 대마왕'이 될 필요는 없다.
내 행복이 최우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