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랑 Feb 07. 2021

모모


 바쁜 어른들의 세계에 적응하는 일은 어린아이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에게 특히나 더 힘든 일이다. 어른들은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좁은 사각 틀 안에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둬두고 온종일 앉아서 일을 시키는 것은 물론,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을 감상하는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얘기한다. "꾸물거릴 시간 없어.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들은 쉴 새 없이 일한다. 종일 혼자 놀다 지친 아이가 다가오면 "지금은 안 돼,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잖니. 나중에.."라고 이야기한다. 어여쁜 아이의 얼굴이 한숨과 실망의 그림자로 드리워지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어른들은 진짜 중요한 일은 늘 "나중에."라고 얘기하며 미뤄버린다.


 이런 어른들의 세계는 일찍이 어린왕자를 통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어린왕자는 세상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비밀을 내게 알려주러 왔다. 그 아이는 내가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존재했기 때문에 나는 그 비밀들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은 새벽에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서 날아온 피터팬이 해준 이야기와 같았다.     

 다행히 아직 어른의 세계에 길들어 있지 않았기에 더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해준 이야기는 별빛을 가득 안고 있는 바다와 같았다. 바다는 점잖게 춤추며 그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생택쥐베리는 어린왕자를 알고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어린왕자가 자기 별로 떠난 후로 그는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별처럼 외로워했다. 그의 주변엔 손해와 이익만을 따지는 어른들이 바글거렸다.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사람의 마음은 점점 시들어간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없기에, 이야기해도 이해해줄 이가 단 한 사람도 없기에, 그는 지독히도 외로웠을 것이다. 그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나는 왠지 알 것만 같다.


 내 친구 모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줄 줄 아는 좋은 친구다. 모모 앞에서라면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다. 까만 눈으로 가만히 상대를 쳐다보며 가끔 고개를 끄덕여주는 모모를 보고 있으면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럼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내게 되고,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유창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해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의 외로움의 샘물은 늘 흘러넘쳤다. 모모처럼 그저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이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해가 갈수록 그런 친구를 만나는 것은 사막에서 우물을 찾는 일처럼 어려웠다.      

 어른들에게 '이야기'란 허무맹랑한 것이고 쓸모없는 것이다. 그들에겐 인생에 대한 비밀이나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왕자의 말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다. "도대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어쩌라는 거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부드럽게 대꾸할 것이다. "마음으로 보세요."라고. 물론 어른들에게 이 이야기는 수수께끼처럼 들릴 수 있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곧 잊혀 질 거라는 것을 안다. 어린왕자나, 피터팬, 모모를 만나더라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 좋은 친구들을 놓치게 된다. 좀처럼 이야기 나눌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숫자다. 더 많은 숫자, 더 많은 일,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얻는 것. 본인들이 쌓아둔 숫자에 파묻힐 거란 생각을 못 했지만 눈치채지 못한 채 사방이 가로막혔고 그로 인해 주변의 온갖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치고 산다. 매캐한 연기와 악취에 둘러싸여 꽃이 주는 향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는 사이 자신이 숫자와 함께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던 시간은 이미 죽은 시간이 되었다는 것,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기기와 베포는 모모의 소중한 어른 친구들이다. 기기는 이야기꾼이고 베포는 청소 할아버지다. 이야기꾼은 진솔하고 청소 할아버지는 인정이 많다. 기기와 베포는 어른이다.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시간이 많다. 


 어두컴컴한 새벽, 홀로 숲속에서 나무를 바라본 적이 있다. 15살 때였다.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똑바로 바라보기가 무서웠다. 심호흡하고 맞은편에 보이는 한 나무를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간 있으니 내가 두려워했던 건 어둠이나, 나를 묵묵히 쳐다보는 나무가 아닌,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내 모습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시커먼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나 자신을 영영 찾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모모를 다시 만나게 된 어느 날, 모모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적절한 낱말을 찾지 못하면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과거 얘기를 했다가 불쑥 현재 얘기를 하는 등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해도 모모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의 까맣고 정직한 눈이 말했다. 다 이해한다고. 나는 따뜻하고 애정 어린 모모 덕분에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아름다운 꽃을 심어주었다. 때가 되면 피어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 한 송이를.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하다. 꽃은 사랑을 받고 자라난다고 했다. 나는 잊지 않고 매일 매일 마음에 사랑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야기꾼 기기와 청소부 베포처럼 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진솔하고 인정 많은 어른,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으로도 볼 줄 아는 어른이. 고맙게도, 모모는 내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사라져갈 때는 또다시 내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모모와 어린왕자, 피터팬과 같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이들이 잊히지 않도록. 어린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 땅에 모든 어른들이 어린아이였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작가의 이전글 놀이하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