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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빈 Mar 15. 2021

그저 그런 프로세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을 보고,

※이 글에는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항에 가면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다. 집에 두고 왔어야 했던 짐은 무엇이었는가 돌아보게 만드는 <인 디 에어>(2009), 혹시 탑승할 비행기에 인질이 있을까 괜한 걱정 하게 만드는 <플라이트 플랜>(2005), 그리고 너무 잦아서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연인 찾아 출국장 앞에서 목놓아 외쳐대는- 멜로 영화들까지. 공항 가본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런 건지, 비행을 앞두고 의자 한편에 몸을 누일 때면 도착지에 대한 설렘보다 공항을 그려낸 여러 영화들이 머릿속을 질주한다. 허나 그 꼬리를 무는 생각들의 종점에는 보통 <우리도 사랑일까>의 주인공 마고가 서 있다.

출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

관광지 홍보 기사를 쓰는 프리랜서 작가 마고(미셸 윌리엄스)는 하는 일과 다르게 공항을 두려워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비행기 놓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비행기를 환승하는 일이 있으면 다리가 아픈 척 직원이 끄는 휠체어에 앉아 목적지 게이트로 이송되는 것을 택한다. 문이 너무 많아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없이 돌아가는 공항에서 길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된다는 뜻일까 고개를 끄덕거리려는 순간, 그녀는 이렇게 덧붙인다.


비행기 놓치는 거 두렵지 않아요.
비행기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게 두려워요. 사이에 끼어서 붕 떠 있는 게 싫어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정이 제일 두려워요.


선택한 결과에 대해선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재고 따지며 결정을 내리는 그 과정이 가장 두렵다. 그래서 차라리 누군가 나를 게이트로 곧장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음, 마고의 불안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 것 같다. <우리도 사랑일까>의 키워드가 만남과 그 권태라지만, 어쩐지 우리 인생에서도 그녀의 불안이 슬쩍 모습을 내비친다. 당장 당신도 카페에서 내가 먹던 것을 먹을지, 반짝반짝 신메뉴를 고를지 머리 쓰며 고민하지 않던가. 그러다 같이 온 사람의 선택에 슬쩍 묻어간 후 한 모금 쪽, 그리고 속으로 아차차 구관이 명관인데.

출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

그리고 이만큼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을 낭만적으로 그린 영화도 없을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 이제 내일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여독에 지친 자들의 기억도 안 나는 귀갓길 차 안에서,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 대니얼(루크 커비)과 마고는 달콤한 숨을 주고받으며 기다란 펜던트를 왕복 운동시킨다. 사랑이 작동하고 있구나. 지켜보는 우리도 두 사람이 내뿜는 페로몬에 취할 무렵, 마고가 차에서 내리며 선을 긋는다. "나 결혼했어요."


여행지에서 벌어진 하룻밤 짜릿한 만남 정도로 넘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고 싶지만, "안타깝네요. 나 여기 살아요." 대니얼은 마고가 살고 있는 건너편 집으로 향하며 태연하게 응수한다. 혼자 볼 그림을 그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새벽부터 인력거를 끌며, 자신의 탄생석이 17인치 맥북이라고 생일선물 챙겨달라 당돌하게 말하는 이 남자는 그날 이후 마고의 시야에 시종 얼쩡거리며 도발한다.

출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몽타주 정사신보다 심히 에로틱하다. 대니얼의 눈빛은 마고를 원하지만 선택을 맡기는 쪽이고, 마고는 그가 어디까지 가고 싶은지 궁금하지만, 남편 루(세스 로건)와의 신의를 지키고자 애쓴다.


30년 후 여름, 오후 두 시 루이스 버그에 있는 등대에서 당신과 키스할게요.
그때는 자격이 있겠지.


마고는 밀어내는 듯하지만 동시에 상대가 들어올 여지도 준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있다. 안온한 결혼 생활이 오히려 스치는 바람에도 살결이 떨리도록 만든다고. 그만큼 인간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에 정착하지 않고 새로운 자극을 갈구한다는 거다. 하지만, 낯선 이에게 끌리는 것은 화학작용이라고 쳐도, 불어오는 바람 하나하나에 감정을 붙이는 것은 배우자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마고는 웃기면 오줌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고, 부유하는 민들레 홀씨 하나도 손에 한 번 꼭 쥐어봐야 하는, 그만큼 순간적인 감정에 응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민한 그녀는 기어코 대니얼을 따라가서 그 감정의 진앙을 확인하기로 결심한다.

출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

반면, 마고와 다르게 루는 한결같은 '소나무' 남편이다.(두 사람의 첫 만남도 궁금하다.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루의 모습에 마고가 먼저 사랑에 빠졌을 것 같다는 꽤 합리적인 추론을 해본다.) 닭 요리 연구가인 그는 말마따나 삼시 세끼 닭만 조리한다. 장난 취향도 일관된다. 그는 매일 목욕 중인 마고에게 몰래 찬물을 붓는 장난을 친다. 훗날 한 방을 위해서다. 이 장기 프로젝트의 끝은 '짜잔-놀랐지? 내가 이 장난을 쳤던 수많은 날들만큼 차곡차곡 당신을 생각해왔어'라고 마고에게 사랑 표현을 하는 날. 그래서 루는 대상이 부재해도(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혹은 샤워 커튼을 사이에 두고도)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다. 배우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그리고 그 영원함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좋은 남편이 있을까 싶지만, <우리도 사랑일까>에서는 보는 시각에 따라 마고가 느끼는 권태로움이 루에게서 기인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부부의 결혼기념일, 모처럼 한 외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마고는 남편에게 본인의 방황하는 마음을 알리고자 새삼스레 안부를 물어보지만, 루는 대화를 위한 대화는 싫다며 딱 잘라 거부한다. 무심도 하셔라. "우린 같이 살고 내가 당신에 대한 모든 걸 다 아는데." 마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한 적 없었던 이 우직한 남자는 배우자의 마음도 변치 않을 거라고, 그렇게 바보같이 믿었던 거다. 애써 웃음 지어 보이지만 그녀는 이미 확인했다. 이 남자가 내 마음에 생긴 작은 균열을 매워줄 수 없음을. 애초에 마고는 식사 때가 되어 먹을 양이 주어지는 감정 자동 급여기가 필요한 것이 아닌, 본인이 원하는 때에 주어지는 간식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도 사랑일까>는 눈치 없는 소나무 남편 루가 새로운 사랑 따라 떠난 마고의 선택에 귀책사유가 있다고 말하는 영화일까?

출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

얼마 전, 클럽하우스에서 영화 <500일의 썸머>(2010)에 대해 얘기를 나눈 방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 방에선 각자의 연애 통계에 입각해 <500일의 썸머>의 이별 가해자를 정해 보는 토론이 진행 중이었는데, 상당히 논리적이고 흥미로운 대화들이 오갔다. 하지만 동일한 방식을 <우리도 사랑일까>에 덧입혀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연인들이 헤어진 이유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이 정말로 실재하는가 알아보는 것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라 폴리 감독은 <우리도 사랑일까>에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장 아름답지만 처연한 비유를 통해 객석에 전달한다. 마고가 버글스의 명곡 "Video Killed the Radio Star"에 맞춰 움직이는 놀이기구를 타는 장면이 있다. 마고와 대니얼 둘이서 한 번, 그리고 마고 혼자 한 번. 도합 두 번이나 등장하는 이 장면이 활짝 피었다가 금세 져 버리는 사랑의 생애를 색채와 리듬을 통해 선명하게 묘사한다. 박자에 맞춰 은근하게 서행하며 주변 탐색하기, 가속이 붙으면 관성에 따라 몸 실어 보기, 손들고 크게 함성 지르기, 반짝이는 조명과 바람에 취한 듯 나풀거렸다가, 갑자기 불이 켜지고, 시간이 다 되어 멈춰버린 놀이기구에 당황해하기. 그리고 자리에 내려 목도하는 놀이기구의 그 앙상한 뼈대란.


인생엔 당연히 빈틈이 있게 마련이야. 그걸 미친년처럼 일일이 다 메울 순 없어.


가족에 대한 의무감에, 오랜만에 루의 집에 찾아온 마고에게 시누이(였던) 제럴딘(사라 실버맨)이 책망하며 말을 꺼낸다. 그녀가 조금 더 일찍 이 사실을 알았다면 루를 떠나는 일은 없었을까. 뜨거운 사랑만 가득할 줄 알았던 대니얼과의 생활도 결국 그녀가 이미 알던, 그리고 질려서 뛰쳐나왔던 생활의 일부가 돼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루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겠지. 나는 마고를 동정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내려졌다.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마고는 비행기를 놓치는 것보다 놓칠까 봐 걱정하는 게 더 두려운 사람이니까. 사랑이 결국 시든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녀는 그래도 끝까지 가봐야 하는 사람이기에. <우리도 사랑일까>에서 마고가 가장 행복해 보이는 장면은 루 곁을 떠난 뒤에 대니얼과 나눈 첫 섹스가 아니다. 오히려 훌쩍거리며 루를 등지고 집을 떠나와 대니얼을 찾기 위해 전력 질주하던 그녀의 모습이 가장 생기 있어 보인다.(카메라와 인물의 거리로 그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전자는 카메라와 멀고, 후자는 가깝게 위치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를 벗어나 결정을 내리고 이제 정신없이 그곳으로 달려가서 실체를 확인한다. 마고가 이 영화에서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순간이다.

출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

모든 사랑도 결국 그런 프로세스를 거쳐왔겠구나. 새로운 사랑이란 없고, 그놈이 그놈이며, 새것도   것이 되기 마련이지.  나이 열여덟, 너무 이른 나이에 <우리도 사랑일까> 보았을까.  냉정한 사랑 영화는 내게 만남에 대한 진한 허무주의를 남겼다.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만날  있을까? 끝이 보이는 관계는 시작하지 않는  서로에게 낫겠지. 원숙한 연애를 해보기도 전에 이미 만남 그다음을 떠올리는 나는 누군가에게는 신중한 사람으로,  누군가에게는 비밀이 많은 사람으로 평가받아왔다.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관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는 동시에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마고처럼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 따라 움직여보면 어떨까 하는,  영화에서 확인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각 말이다.

출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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