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의 먼지를 닦으며

by 하얀밤

가전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게 뭐가 있겠냐마는 그중에서도 저에겐 세탁기가 1순위입니다.

냉장고가 자기가 1위가 아니었냐며 손을 흔드네요. 냉장고도 최고로 소중합니다. 1위가 여러 개라는 게 정확하겠네요. 1위 세탁기, 1위 냉장고, 1위 로봇청소기, 1위 의류건조기. 이 넷은 순위를 가릴 수 없어 제 마음속 공동 1위입니다.


저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하루에 한 번씩 빨래를 합니다. 언젠가 팟캐스트 '지대넓얕'에서 집안일을 '닦기'와 '쓸기'로 나누는 걸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패널 한 명이 집안일을 두 갈래로 나누면서 두 갈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은 채 나머지 패널들에게 집안일 이름을 말해볼 테니 어느 것에 속하는지 골라보라 했습니다. 빨래는 '닦기', 청소는 '쓸기', 설거지는 '닦기', 빨래 개기는 '쓸기'. 동시에 같은 대답을 하던 패널들이 왜 자기들이 같은 대답을 떠올리게 되는 거냐며 신기하다 했습니다. 저 또한 패널들과 같은 답을 떠올렸기에 이런 참신한 분류 기준을 만든 패널에게 박수라도 치고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가 '닦기'에 해당하는 집안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두 갈래의 특징을 굳이 설명해보자면 '닦기'는 더러운 것을 화학 작용의 도움을 받아 없애는 것, '쓸기'는 정리되지 않은 것을 물리적 힘을 이용하여 가지런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재미있는 분류 기준을 알게 되자, '닦기'에 해당하는 일들을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이유를 분명히 알면 더 안심하고 좋아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계기였달까요.


'닦기'를 좋아하기에 저는 빨래를 좋아합니다. 모터가 만들어내는 힘찬 물살과, 옷감의 얼룩과 때를 씻어내는 세제의 화학 작용과 적절한 기다림이 이루어내는 조화가 너무나 좋습니다. 이 과정을 한 바퀴 거치고 나면 마음속에도 시원한 물이 세차게 흐르고 지나간 것처럼 후련함이 느껴집니다. 여유가 있는 날에는 물빨래가 가능한 옷과 이불을 몇 차례 더 넣습니다. 힘찬 모터 소리와 물살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면 폭포수 아래 앉은 도사님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오래 사용하여 너덜너덜해진 행주를 버리는 날이었습니다. 행주에 물을 흠뻑 적셔 두리번거리면 찌든 때, 묵은 때 묻은 것들이 서로 자기 차례가 되었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귀한 손님을 고르는 마음으로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세탁기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세탁기는 아우성도 치지 않고 오히려 주인에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바라보는 것을 낯설어하는 듯했습니다. 성큼성큼 걸어가 세탁기의 몸통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말없이 빨래만 빨아대던 세탁기를 닦는 것이 마치 나이 든 부모님의 몸을 닦는 것 같았습니다. 잘난 척도 하지 않고, 생색도 내지 않고, 매일매일 옷뿐 아니라 주인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만들어주었던 세탁기인데 정작 세탁기 몸통엔 찌든 때가 많았습니다. 행주의 면을 바꿔가며 구석구석 정성껏 닦는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았는지요. 세탁기 문을 열 때는 마치 수줍은 듯 팔을 올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헛, 여기까지 닦아주는 거야?' 하며 말이죠.


하얀 색인 줄 알았던 세탁기는 닦고 보니 새하얀 색이었습니다. 목욕을 마친 세탁기가 조용하고도 느린 목례를 하는 듯했습니다. 인사조차 화려하지 않은 모습에 세탁기야 말로 부모이자, 오랜 친구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옆에서 묵묵히,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를 지지해주는 존재 말입니다. 한결 예뻐진 세탁기를 조심스레 진정한 1순위로 올려봅니다. 6년 간 정이 든 녀석이 고장 나지 않고 오래오래 제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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