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진자가 되어 바라본 코로나 세상

이 싸움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by 하얀밤

그날은 주말이었고, 모처럼 외출을 한 날이었습니다. 아들 딸과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아이스크림 컵을 하나씩 손에 쥐고 열심히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지요. 여느 때처럼 개구진 표정을 짓는 아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폰 카메라를 켜서 초점을 맞추려는 순간이었습니다. 화면이 수화기 그림으로 바뀌고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아이들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딸이 이틀 전 급식소에서 확진자 학생 가까이 앉았다고 급히 검사를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퓨즈가 끊긴 듯 사고가 멈추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뉴스에서, 인터넷에서 봤던 정부의 정책과 지침들이 자음과 모음으로 분해된 채 의미 없는 조각이 되어 머릿속을 떠다녔습니다. 잡히지 않는 단어들이라도 주워 모아야 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었기에 정신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듯 달랬습니다.


'우리 동네 보건소로 가야 하나? 보건소는 요즘 줄이 길다던데.'

시계는 이미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보건소에 줄이 길다면 도착하기 전 검사가 마감될 것 같았고 다른 지역의 보건소나 선별 진료소를 검색했지만 거리가 만만찮았습니다. 가정에서 하는 자가진단키트를 이용한 검사도 괜찮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키트를 사기 위해 가까운 약국을 검색했습니다. 두 군데나 검색되었지만 약국에 있는 키트도 품절 대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전화부터 먼저 걸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곳은 품절, 한 곳은 두 개가 남아있다 했습니다. 얼른 달려가 두 개를 모두 구매했습니다.


집까지 가기엔 시간이 촉박하여 차 안에서 검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키트를 손에 꼭 쥐고 가방 안으로 숨기려는 저 스스로를 보며 제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항상 무서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그 자체가 아니라, 확진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말입니다.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 걸 알기에 더더욱 그 입장이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얼마나 억울할까,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그 기분을 제가 느끼는 날이 없기를 바라며 지내왔습니다.


키트에 동봉된 설명서에 있는 QR코드를 찍으니 동영상으로 사용법을 보여줍니다. 내용을 숙지한 후 딸의 코에 면봉을 넣고 휘휘 저었습니다. 어설픈 제 손길과 얼굴을 뒤로 빼는 딸. 이래도 되나, 1.5cm라면 더 깊이 넣어야 하나? 면봉 끝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안까지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어찌 됐든 열 번을 채웠습니다. 시약 통을 열고 면봉을 시약에 담가 꾹꾹 누르듯 열 번 젓고 뚜껑을 닫은 후 아래 위로 열 번 흔드는 이 일련의 과정을 척척 해내는 제가 신통하게 느껴졌습니다. 한 번의 동영상 시청으로 이 모든 것을 기억하다니. 고3 시절 EBS 수능특강을 이렇게 집중해서 봤다면 더 좋은 대학을 갔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 키트를 아래에 두고 세 방울 떨어뜨릴 차례입니다. 영상에서 본 '천천히 세 방울'이란 말은 또 수많은 의문의 가지를 뻗어대고 있었습니다. '1초에 한 방울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빗방울처럼 우수수 떨어뜨리지만 말라는 뜻일까?'

고작 세 방울 떨어뜨리는 일인데 말이죠.


15분 알람을 맞춰놓고 기다렸습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공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슬그머니 음악을 틀었더니 얼마 전 아이들과 재미있게 보았던 <씽2게더>의 OST가 흥겹게 흘러나왔습니다. 경쾌한 음악이 경쾌한 색을 띠고 차 안을 떠다니는 동안 딸은 지친 듯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습니다. 노래 따라 부르기를 즐기는 아들도 입을 닫고 있었습니다. 최고조에 달한 음악 속에서 모두 침묵을 지켰습니다. 최선을 다해 침묵과 긴장을 메우는 음악이 애처로웠습니다.


15분 뒤, 키트엔 선명한 한 줄이 남았습니다.

흥겨운 음악이 드디어 제 빛을 발하고, 가족들은 웃으며 차에서 내렸습니다. 한껏 긴장되었던 얼굴 근육이 기지개를 켜는 듯했습니다. 한 줄이 나온 키트의 사진을 찍어 담임 선생님께 보내니 담임 선생님도 다행이라 하셨습니다. 한 줄짜리 키트는 차에서 내린 가족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고, 검사의 정확도가 어떤지, 얼마나 정확하게 검사를 시행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는 제 머릿속을 부지런히 다니며 지우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지우개를 굳기 믿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저녁,

딸의 이마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키트 하나를 꺼내 검사를 해봤습니다. 처음보다 훨씬 능숙한 손길로 세 방울을 똑, 똑, 똑. 그리고 15분. 선명한 한 줄입니다. 10살이 넘어가니 아프더라도 고열이 난 적이 드물었기에 검사 결과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이를 안심시켰습니다. 아니,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이를 비웃듯 아이의 열은 39도를 훌쩍 넘었고, 성분을 번갈아가며 해열제를 먹여도 내려가지 않는 고열이라는 낯선 손님과 밤새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코로나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튿날 딸은 PCR 양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양성이라는 문자를 받은 딸의 심정이 어떨까 걱정이 되어 저는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오히려 눈치 없이 담백한 아들이 딸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프다며 때리지 말라고 딸이 소리를 지르자, 아들은 겸연쩍은 듯 딸의 팔을 살살 쓸어주었습니다. 길이는 짧지만 두께는 저와 비슷한 아들 손이 그날따라 더 아이답게, 그리고 어른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게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틀 뒤 아들이 고열에 시달렸고, 저는 꼬박 나흘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간호를 했습니다. 한두 시간 간격으로 알람을 맞춰놓고 아이의 열을 쟀습니다. 아이 입에 씌워놓은 마스크와 제 입에 쓰인 마스크가 여기가 더 이상 편안한 우리 집이 아님을 상징했습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답게 굴어보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어느새 품에 안겨 있는 아이와 제 손에 들려있는 아이의 옷과 물건들이 저 또한 피해 가기 힘들 거란 예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쩍 자주 들르게 된 지역 맘카페에서는 가족이 확진되어도 끝까지 음성으로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떠돌았고 혹시 저도 그중 한 명이 되지 않을까, '슈퍼 항체'라는 들어본 듯 들어본 적 없는 용어의 그것이 제 몸에 있지는 않을까 기대해 보기도 했습니다.


아들과 딸은 2~3일 좀 고생하더니 펄펄 날아다녔습니다. 같이 확진이 되니 한 방에서 지내며 깔깔거리고 게임을 하고 간식을 먹고 유튜브를 보며 즐겁게 보냈습니다. '즐겁다'는 말은 제가 한 표현이 아닙니다. 둘은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즐겁고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 안 아프고 넘어가는 게 어디야, 너네가 즐거우면 됐어 하는 마음에 저도 차라리 이 시기를 즐기고 싶었습니다. 한 명만 걸렸을 때 했던 격리인 듯 격리 아닌 격리 같은 코스프레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같이 돌볼 수 있으니 훨씬 수월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둘만으로 끝이 났을까요?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문장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딸의 격리 기간이 막바지에 들어서던 날, 남편의 목이 붓기 시작했고, 아들의 격리 기간 막바지에 제 목이 부어올랐습니다. 네, 저희 가족은 그렇게 모두 확진자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하루 정도 미열이 났고, 저는 37도 이후로는 열도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둘 다 인후통은 좀 심했지만 처방약을 먹으니 빨리 좋아졌습니다. 아이를 낳은 이후로 손을 잘 씻은 덕분인지 근 10년 동안 심하게 아팠던 적이 없었던 저인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인후통이 오는 걸 보니 바이러스 녀석이 인증은 확실히 하고 가는구나 싶었습니다. 7일 격리라 직장은 쉬었으나 어차피 출근하면 못 나간 동안 쌓인 일을 해야 했기에 집에서 재택근무처럼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직접 사람을 만나서 하면 5분 안에 끝낼 일들을 전화를 붙잡고 몇 배의 시간을 들여 하다 보니 차라리 직장에 출근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제 저의 걱정거리는 더 이상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글의 서두에도 밝혔듯이 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확진자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확진자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세운 방역 수칙에 어긋남이 없이 지내서 욕을 먹지 않는다.'가 이제 제 목표가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주어진 과제는 3월 2일에 아이가 학교에 등교를 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격리 기간은 끝이 났으나 부모의 격리 기간은 남은 시점에, 확진되었던 아이는 학교에 가도 되는 걸까요? 고민이 깊어지던 날 오후, 정부의 방역수칙이 전면적으로 개편되었습니다. '3월 1일부터는 접종 여부에 상관없이, 확진자의 동거인은 수동 감시자로 전환된다.' 와우, 입 밖으로 탄성이 나왔습니다. 그 이후의 문장이 '와우'를 '어우'로 바꿨지만요.

'단, 학생과 교직원은 3월 14일부터 적용한다.'


수칙은 간단해 보였으나 이미 확진된 이력이 있는 아이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등교 가능 여부가 무척 애매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하니 사람마다 말이 다릅니다. 학교에 확인을 해보라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이었으나 문제는 학교에 확인하여 얻은 답이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학교장 재량에 맡기는 분위기여서 그런가 보다 싶어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보건 선생님께 전화로 여쭤보니 확진자였던 아이는 안심하고 등교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학교에 나오는 동안 밀접접촉자가 다시 되더라도 한동안은 양성 반응이 나올 수 있으니 검사도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늦은 시간에 전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을 알아주시고 시원시원하게 답을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김영란법만 없었다면 뭐라고 보내드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보건 선생님들의 단톡방에서 새로운 수칙에 대해 끊임없는 해석과 논의를 하고 있다는 말씀에서는 학교 안의 유일한 의료 전문가로서의 느끼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얼마나 큰 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 의문이 깨끗이 풀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학교마다 다른 답변이기에 또 불안했습니다. 혹시 아이들 학교 보건 선생님이 수칙을 잘못 해석하신 거라면? 이후의 일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다시 몰려왔습니다. 다시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지역 맘카페를 벗어나 전국구로 검색을 하니 저와 같은 입장의 학부모가 애매한 지침 때문에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등교해도 된다는 학교, 부모의 격리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함께 격리해야 된다는 학교의 의견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욕먹기 싫다는 저의 굳은 의지는 결국 서울 지역 어느 맘카페에 올라온 글에 다다랐습니다. 그 글을 쓴 분은 너무나 답답해서 교육부에 바로 질의를 했다고 합니다. 한참을 기다려 받은 답변은, '확진 이력이 있는 학생은 접종 여부에 상관없이 등교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는 '학교가 인지를 잘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말은 이 혼란을 교사와 학부모의 인지 수준 탓으로 여기는 듯하여 매우 불쾌하게 다가왔습니다. 분명하지 않는 용어(예를 들어 '공동 격리자'라는 말)와 문장, 하루아침에 바뀌는 정책을 정말로 교사와 학부모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여 이렇게 다들 우왕좌왕하는 걸까요? 재택치료라는, 실제로 겪어보면 치료라를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제도의 민낯을 그들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거리 두기', '격리' 등 코로나 시국 동안 우리 입에 오르내렸던 말들의 의미는 겉포장을 벗겨보면 물음표 투성이입니다. 그들이 과연 그것을 모르고 있을까요? 그들 중에도 확진자가 있고, 학부모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들도 분명 저처럼 몇 시간 동안 휴대폰을 잡고 당장 내 아이가 내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검색했을 것입니다.


확진자가 되지 않기를 바랐던 시간과 확진자의 부모로서의 시간, 확진자 당사자가 되었던 시간을 돌아보니 '확진'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확진'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확실하게 진단을 함. 또는 그 진단.'이라고 나옵니다. 어떤 병에든 붙일 수 있는 이 단어가 코로나 시국을 거치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로 변해버린 듯합니다. 차별, 공포, 억울함을 내포한 이 불덩이를 안아 든 사람들의 고통을 저는 '정체성의 모호함으로 인한 혼란'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 차별을 받고 차별을 하는지,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정체를 알 수 없고 의문만 남는 상황 말입니다.


3월 1일부터 방역 수칙이 대대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방역을 포기하자는 것이냐, 이제는 감기로 취급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확진자였던 우리 가족은 이제 이 혼란에서 짧게는 45일, 길게는 90일 동안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탄과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하루에 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제 옆으로 자리를 옮겨오고 있습니다. 땅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모두가 저와 같은 위치로 와야 끝이 나는 걸까요?

싸움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전쟁으로 인해 부서진 마음들만 남고 정작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를 모르게 될까, 혹은 잊게 될까, 그것이 이제는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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