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고통의 역치를 높여 나를 사랑하겠다

2023.7.9.

by 하얀밤


"양산을 왜 안 갖고 나왔을까!"



습기를 볼 가득 채운 더위가

숨을 훅, 내뱉는다.

햇볕조차 갓 빨아낸 담요처럼 축축하고 무겁다.


딸과 함께 도서관을 다녀오는 길.

한낮의 횡단보도를 건너며

4년 전 방문했던 방콕을 떠올렸다.


호텔 문을 열기가 무섭게 몸에 휘감기던 열기와 습기.

손선풍기와 보조배터리를 가장 먼저 챙기던 그때.

긴 옷을 입고 햇빛 아래 정렬해 있던 공사장의 인부들과

정복을 갖춰 입고 미동도 않던 왕궁의 군인들이

내 눈엔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방콕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그 안쓰러움이 오직 내 개인적인 기준에 의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들은 그 정도의 더위에 익숙했다.

더위를 견디기 힘들어했던 건 나였다.

더위라는 평등해 보이는 고통조차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랐다.

길들여지는 정도에 따라 고통이 고통이 아닐 수 있었다.


가사에 적응하는 내 모습도 그렇다.

엄마 보살핌 아래에서 공부만 해도 되던 나는

(공부만 해야 했다는 게 맞겠지만)

결혼하고 혼비백산했다.


가사가 얼마나 종류가 많고 섬세한 일이고

손을 놓는 순간 집이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는지

꿈에도 몰랐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갈 수 없음에 처음으로 깊은 좌절을 느꼈다.

엄마가 흘리던 땀방울을 떠올리며 울기도 했다.

내 땀방울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두털대기도 했다.

(지금도 자주 그런다.)


결혼 15년 차.

이제는 가사를 물 흐르듯 한다.

15년 전의 내가 보면 기함을 할 만큼의 가사를

짧은 시간 안에 뚝딱 해낸다.

그렇게 힘들지도 않다.


방콕의 인부들과 군인들이 더위를 받아들이는 것도

내가 가사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과 같을 것이다.

그들이라고 어찌 덥지 않으리.

더운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며 익숙해지며

더위에 대한 역치가 나보다 훨씬 높아졌을 뿐이다.


도덕책 같은 소리를 쓰게 되었다.

"적응하는 만큼 고통이 줄어든다."


나는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태어났기에

태국 사람보다 더위를 잘 견딜 자신은 없다.

그러나 그 어떤 일이든

익숙하지 않다고 내팽개치지는 않겠다.

익숙해질 만큼 해서 내 것으로 만들겠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겠다.


나는 그런 나를 분명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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