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찡그린 이가 저를 향해 걸어옵니다. 3미터, 2미터, 1미터.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좁은 복도입니다. 그는 저를 보지도 않고 까닥, 목례를 합니다.
저 멀리서 그가 걸어올 때부터 이 시간에 여기를 지나가게 된 게 싫습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불편함이 엄습합니다. 앞으로도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으니 이때를 대비한 컨셉을 확실히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인사는 하고 살자. 그가 까딱, 목례를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인사를 합니다.
직장에서 싫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규모가 작지도 않은 직장인데 그 사람과 제 업무에 교차지점이 많습니다. 협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할 때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버럭'하는 그와 대화를 이어가기 힘듭니다. 정체된 업무들이 눈앞에 쌓여갑니다. 이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저에게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 사람, 아픈 사람이야. 대학 병원에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으러 다닌대. 그러니까 이해해줘."
어째 안색이 어두워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던 날에도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찡그린 그의 얼굴에 익숙해져서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병이 있었나 봅니다. 대학병원에 다닐 정도면 가벼운 병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갑자기 제가 '너무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쌍방의 협조가 필요한 저 업무들을 제가 다 떠안아야 할 필요는 없는데, 마치 그래야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병력과 주변의 시선이 저더러 '착한' 사람이 되라고 무언의 압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착해져야' 할까요.
제가 착해지면 그의 병에 도움이 될까요.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그와 공적으로, 사적으로 갈등을 겪는 사람들은 문제의 본질을 읽기도 전에 그의 엄청난 병력을 듣고 힘이 쭉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는 순간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읽지 못하고 배려라는 이름 속에 어물쩡 넘어가는 패턴을 수없이 그는 반복했을 것입니다.
아픔이 무기가 되는 순간, 아픔은 나에게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몸이 아픈 건 분명히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 고통이 없어지는 것도 두려운 일이 됩니다. 배려는 언제나 달콤하니까요.
매달 생리통이 올 때마다 가족에게 아픔을 호소하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통을 혼자 감내하고 있음을 수시로 가족들에게 주입하며 당당히 소파에 드러눕던 제 모습 말입니다. 소파에 눕는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기분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집 안에는 찡그린 제 얼굴과 아픈 사람을 집에 둔 가족의 어두운 표정만이 떠돌았습니다.
생리통은 근종이 되었고, 근종은 생리통을 악화시켰으며 결국 수술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술까지 한 '정말 아픈' 사람이라는 타이틀은 저에겐 당당함을, 가족들에겐 죄책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느꼈던 억울함이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병을 키웠다는 것을요. 여자로, 엄마로 잘 살기 위한 길을 찾으려 하니 놀랍게도 생리통은 약으로 조절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과 병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좋겠지만 그 길은 요원해 보입니다. 그와의 갈등은 그가 병으로부터 자유를 찾지 못하는 한,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다는 것이 이처럼 참 어렵습니다.
그의 마음과 저의 마음이 오늘은 또 얼마나 부딪치게 될까요.
싫은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내 마음을 점검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