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생김새만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게 버거워서 내년엔 부장직을 내려놓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 봅니다. 내 고유 업무 하나 쥐고 지지고 볶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서요. 그렇지만 이내 이왕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도망가지는 말자고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여럿의 마음을 모으는 과정은 힘들지만 제 마음을 읽는 기회도 주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꽤 유능한 사람이거든요. 엄청난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저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갈 친화력 또한 그녀의 큰 장점으로서 부서 업무에 큰 도움을 줍니다.
"아니, 부장이 하라고 하면 다 해야 하는 거예요?!!"
부장 자리에 앉자마자 코로나에 확진되어 부원들과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유선으로 업무를 처리하던 그 때였습니다. 유독 통화가 어려웠던 K와 드디어 전화 연결이 됐다는 기쁨은 그녀의 비명에 가까운 말과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정지된 영상처럼 멈춰있다가 잊고 있던 재생 버튼을 누르듯 목구멍에 걸린 공기를 꾸울꺽 삼켰습니다. 미처 발화로 이어지지 못한 공기 덩이가 속을 더부룩하게 만드는 걸 느끼며, 준비했던 '여보세요' 대신, "이. 보. 세. 요."를 천천히 읊듯이 말했습니다. 언짢음을 전달하기 좋은 속도와 어조였다는 생각이 무색하게 심장은 갓 어항에서 탈출한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몸 전체의 피가 심장으로 쏠린 듯 손발이 저려오고, 목젖이 떨려왔습니다. 꽤 단호하게 말했는데도 제 말은 몇 배로 볼륨이 높은 그녀의 속사포 같은 말들에 고꾸라지듯 묻히고 말았습니다.
"제가요, 지금 원하지 않는 곳에 발령이 나서 지금 얼마나 열받아 있는 줄 알아요? 배신을 당했단 말이에요! 배신을!! 원하지 않는 곳에 발령 난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일을 하라고요? 그걸 제가 왜 해야 하는데요? 부장이면 다예요?"
"원하는 업무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저라고 원해서 이 자리에 앉았겠어요. 발령을 받으시면서 업무분장에 동의를 하셨을 거 아니에요. 일단 맡았..."
"저는 그 업무 못한다고요! 다른 업무를 하고 싶었는데, 그 일이 다른 사람한테 갔잖아요. 어쨌거나 저는 못합니다. 못해요! 제가 운전을 매일 편도 한 시간을 해야 한다고요. 면허 따고 10년째 장롱면허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운전하게 돼서 남편이랑 같이 왔다 갔다 몇 번을 연습한 줄 알아요? 힘들어 죽겠어요! 맨날 운전할 때 전화를 하더니!"
'여유 있을 때 전화를 달라고 한 달 전에 문자를 보냈었는데...' 공기와 섞이지 못한 말을 다시 속으로 삼켰습니다. 더부룩해지는 속만큼 두려움이 커져갔습니다.
'부장을 맡는다는 게 이런 건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품고 가지? 이 사람이 업무를 보이콧하면 그 업무는 누가 하게 되는 거지?'
제 역량을 넘어선 것 같은 상황에 압도되어 K의 목소리보다 제 머릿속이 더 시끄러워졌습니다. 목소리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장 박동수는 더 빨라졌습니다. 손이 저리고 뜨거워진 전화기 때문에 땀이 났습니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동물적이고 말초적인 감각이 낯설었습니다. 낯선 상황과 낯선 감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때 K가 대뜸 물었습니다.
"부장님, 몇 살이에요?"
"네?"
"몇 살이냐고요."
"하, 그러는 그쪽은 몇 살인데요."
"나요? 나는 먹을 만큼 먹었어요. 동안이라고 다들 하지만요. 올해 XX살이에요."
"저보다 7살이나 많으시네요."
"그래요? 어, 그럼 동생이네. 동생!"
"전 당신 같은 언니 둔 적 없어요. 말 놓지 마세요."
"아, 네네.. 미안해요.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배신받아 발령 나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가지고. 나 진짜 이런 사람 아니야. 못 믿겠죠?"
"못 믿겠는데요."
"아유 참. 큰일 났네. 앞으로 1년 동안 내가 부장님한테 진짜 잘해줄게요. 지켜봐!"
이런 말 하면 그분께 죄송하지만, 눈앞에 외계인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화 어디에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분수령을 홀로 넘은 K는 순식간에 태도를 우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묻는 게 의미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이유를 들어도 제가 이해할 수 없을 거니까요.
'K는 나에게 외계인'이라는 개념이 그녀를 보는 렌즈가 되고, 그녀를 대하는 태도의 지팡이가 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그녀는 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A라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녀에게 취해야 하는 B를 압니다. B는 저에게 맞지 않는 불편한 옷입니다. 그러나 B를 잘 취하면 K의 역량을 얻습니다. 그녀는 꽤 유능한 사람이거든요. 엄청난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저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갈 친화력 또한 그녀의 큰 장점으로서 부서 업무에 큰 도움을 줍니다.
환호하고 칭찬하는 일이 대부분인 B지만, 우렁각시처럼 몰래 행하는 B도 있습니다. 말과 행동의 보폭이 큰 그녀가 놓치는 세세한 것들을 뒤따라가며 줍고 정리해주는 일입니다. K가 접수해야 하는 공문을 미리 파악해서 보고 기한을 알려준 뒤에 제 캘린더에도 적어놓고 잊지 않게 챙겨준다거나, 전 직원에게 알려야 할 때 메신저로 보낼 문구를 정리해주는 것 등입니다.
K에게 취하는 B는 다른 부원들에게 하는 것과 다릅니다. 부원들과 보내는 시간이 축적되면서 부원 개개인에게 맞춘 가면이 서서히 완성됨을 느낍니다. K를 대할 때와 달리, 조용한 소녀 같은 부원을 대할 때는 말과 눈빛과 행동이 저절로 섬세하고 부드럽게 바뀝니다. 가면 체인지를 얼마나 빠르고 융통성 있게 잘하느냐가 중간관리자의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 가면들 중엔 집에서 편하게 퍼져있는 제 모습과 닮은 게 거의 없습니다. 모두 업무용 가면, 직장용 페르소나입니다.
K와의 관계는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그녀를 대면할 때 쓰는 '가면 ver.B'는 다른 가면보다 저에게 몇 배로 버겁습니다. 많이 웃어야 하고 호응도 많이 해야 합니다. K가 들려주는 자녀 교육 이야기에 '대단하네요'를 연발하며 중요한 공문을 처리하는 건 여전히 어렵습니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이해가 안 가서 스스로가 난독증인지 의심할 지경입니다. 한참 동안 시선이 고정된 문장이 흐물흐물 무너지는 것 같을 때, 제 정수리에서 뜨끈한 것이 올라올 것 같을 때, 공문의 문장 하나보다 부원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아예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얼굴 생김새만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게 버거워서 내년엔 부장직을 내려놓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 봅니다. 내 고유 업무 하나 쥐고 지지고 볶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서요. 그렇지만 이내 이왕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도망가지는 말자고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여럿의 마음을 모으는 과정은 힘들지만 제 마음을 읽는 기회도 주기 때문입니다.
숫자만 커지는 경력을 쌓지 않기 위해서, 경력만큼 꽉 찬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일대일 맞춤 가면을 만드는 것도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뭐든 반복하면 잘하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