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중간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파도를 넘는 것을 배우는 자리, 중간관리자

by 하얀밤

경력이 10년이 훌쩍 넘었다고 부서 하나를 이끌어보겠냐길래 이 경력에 거절하면 부끄럽다 싶어 선뜻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제안을 받은 부서에서 일해 본 기간이 길어 웬만한 업무는 파악하고 있었기에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이 직위에서 겪는 어려움이 업무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올 줄은 몰랐지만요.


부장으로서의 첫 주를 집에서 보냈습니다. 하필 그 시기에 코로나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부원으로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책임감을 느끼며 수시로 업무시스템에 들어가 지난해의 공문들을 검색하고 탐독했습니다. 격리기간은 업무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어서 올해 전보해 온 부원들이 잘 모를 수 있는 우리 기관만의 특성이 담긴 인수인계 내용도 마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원 한 사람에게 급히 전달할 사항이 있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한두 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올해 전보해 온 부원이라 적응한다고 다른 사람보다 더 바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문자를 남겼습니다.


'올해 부장을 맡은 ○○○입니다. 많이 바쁘시지요. 업무차 드릴 말씀이 있으니 여유 있을 때 연락 주세요.'


그에게 보낸 메시지 옆 숫자 '1'은 하루가, 이틀이, 사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첫 단추부터 어그러진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한 과정을 쓰자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부장으로서 처음 마주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라 정의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타 부서 부장과의 갈등이었습니다.

작년에 새로운 사업이 상위 기관으로부터 하달되면서 이 일이 어느 부서에 속하느냐로 한참 논란이 있었습니다. 한 번 맡는 선례가 만들어지면 웬만하면 타 부서로 일을 넘기기 힘들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업무 자체도 어느 한 부서를 지정하여 몰아주기가 애매한 내용 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맡는 순간 두 부서 일을 뒤집어 써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첫 해에는 어찌어찌하여 연관성이 70:30 정도인 두 부서가 일을 나누었으나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애매한 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부서가 다른 담당자 두 사람이 막역지우였던 덕에 '사적인' 감정을 듬뿍 넣어 무리 없이 한 해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둘은 일을 하면서도 다음 해가 걱정됐다고 합니다. 공적인 관계로만 접근하면 갈등이 일어날 요소가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지요. 연말이 되자 둘은 비중이 70인 A부서에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자리를 만들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 일과 관련한 공문을 일차적으로 접수하고, 내용에 따라 적절히 타 부서의 협조를 구하거나 일을 넘기는 역할을 하게끔 말입니다. 실무를 한 사람들의 의견이었기에 부장들과 기관장의 논의를 거쳐 올해부터 A부서에 새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30의 역할을 맡은 부서가 제 부서였습니다.


문제는 A부서 부장으로 새로 전보해 온 사람이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컨트롤 타워 자리의 유래와 성격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우리 부서로 협의도 없이 수시로 일을 밀어냈습니다. 적절한 절차를 거친 결과에 모두가 동의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그를 통해 알았습니다. '한 번 맡아버리면 빼도 박도 못하는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감정을 담아 일을 밀어내는 사람을 공적인 마음으로만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무언의, 유언의 갈등이 한 달 넘게 지속되니 이렇게 하면 한 해를 보내기 힘들 것 같아 확실히 선을 긋기 위해 상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업무 내용을 재확인하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요. A부서 부장은 크게 반발했지만 일의 성격을 아는 이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상황이었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적인 협의 과정을 한 번 더 거치며 업무 분배 문제가 일단락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저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찌푸린 얼굴로 저를 보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제 마음을 가다듬고 제 일을 해낼 수 있어야 하는 자리가 부장의 자리라는 걸 깨닫습니다. 갈등이 두려워 일을 덜컥 받아버리면 결국 우리 부원들이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지키는 엄마의 역할을 직장에서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두 파도를 겨우 넘었는데 저 멀리서 새 파도가 밀려옵니다. 이번 파도는 더 규모가 큽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협조와 도움이 필요해 보입니다.


돈을 받으며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직장이라던 심리학자 황상민 박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미 시작해버린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저 파도를 넘으면 다음 파도가 올 것을 아니까요. 파도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 마음을 보듬으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도 헤아리며 슬기롭게 넘어봐야겠습니다.


졸업을 위해 꼭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에 수강신청을 한 기분입니다.

일 년 뒤 저는 어떤 학점을 스스로에게 주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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