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이게 '나'입니다.

2023.8.27.

by 하얀밤


엇,
여기서 스탑.



대화가 길어지니 긴장이 느껴진다.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며 켰던

내 '대외용 어울림 시간' 타이머가

0을 향해 가고 있었다.


0이 지나면 나는

이 관계를 잘 이끌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의미 없는 말소리를 내뱉기 시작할 터였다.

나조차 무슨 소린지 모를 말들에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이다.


3,

"날씨가 덥네요."

2,

"다들 오늘도 수고 많으시겠어요."

1,

힘내보자는 사람들의 응답이 오고 가고

0,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자연스러웠다.




내 책상에 앉으니 안도감이 든다.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있으니

이어지는 대화들이 들린다.


요즘 개봉한 영화가 볼만하다고

새로 생긴 맛집에 드디어 가봤다고

이번에 산 탁상용 선풍기가 좋다고

사람들은 대외용 대화를 자연스레 잘 나눈다.


나는 대외용 에너지를 소진한 상태라

조용히 나 혼자 있어야 한다.

충전되기 전까지 내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선 전화가 울렸다.

예산 담당자가 별로 즐겁지 않은 소식을 들려주었다.

내려온다던 예산이 불시에 깎여서 겨우 맞추고 있었는데

다시 예산이 내려온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부원들이 일하기 힘들어진다.


상관을 찾아갔다.

내려오는 예산을 거부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야겠지만 곤란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얘기를 할 때는 긴장은 되지만

타이머를 켜지는 않는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병가를 두 달 낸 사람 대신 온 계약직 직원이

혼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아주 오래 전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같이 밥 먹으러 가요."


내 말에 그녀가 반가운 듯 일어섰다.

고작 두 달만 있다가는 사람이 아니라

두 달이나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이다.

같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그녀가 나와 초등, 중등 동창인 걸 알게 됐다.

나보다 언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학교 가는 길에 있었던 문방구와

교정의 나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대화에서는 타이머가 필요 없었다.




내 타이머는

내가 알아서 켠다.


왜 그런 타이머를 켜고 끄냐고

나를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나를 알다가도 몰라서 되게 불안했었는데

이제는 내 타이머를 자연스레 내것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차가운 사람도 아니고

나는 따뜻한 사람도 아니고

인간관계에 서툰 사람도 아니고

인간관계에 능숙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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