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도망가지 않아서 무섭지 않게 되었다

2023.10.15.

by 하얀밤


"오늘은 팀장님도 왔어요~"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그녀가 들어왔다. 퇴근 후 부랴부랴 주차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와 어질러진 거실을 치운 직후였다. 코웨이 코디 아줌마가 우리집 거실에 관심이냐 가지겠냐마는, 그래도 외부 사람이 집에 오는 날은 신경이 쓰인다.


아직 정수기 위에 올려놓은 물건도 못 치웠는데. 알아서 치우시겠거니 하면서도 찜찜하다. 퇴근 후 바로 달려온 거라 이보다 더 빨리 오기도 힘들다. 어쩔 수 없다.


그날은 아줌마가 제대로 잘 하는지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날이었을 것이다. 점검 때마다 미비한 점이 있었기에 제대로 지켜보려고 매의 눈을 떴다.


그나저나 팀장이라는 사람은 왜 와 있는 거지?


팀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보고 슬며시 웃었다. 영업용 미소다. 나는 코웨이에서 정수기, 연수기, 청정기를 다 렌탈하여 쓰는 중이었다. 신혼살림으로 정수기를 들이면서 코웨이와 연이 닿았다. 아이를 낳고,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뒤부터 10여 년을 같은 코디 아줌마에게 관리받으면서 아줌마의 설득에 못 이겨 연수기와 청정기까지 들였다. 세 가지를 다 갖춘 것도 만 5년에 가까워져 모든 제품의 렌탈 만기가 다가오는 참이었다.


"고객님, 여기 잠깐 보실래요?"


가오나시처럼 주방 구석에서 말없이 서 있던 낯선이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어느 집에서든 했을 법한 익숙한 몸짓으로 내가 매일 밥을 먹는 내 식탁에 낯선 팜플렛과 낯선 펜을 잡은 손을 올렸다. 침범당한 식탁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거절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예고받지 않은 낯선 이의 방문(미리 알았더라면 거절했을), 낯선 이의 목적 분명한 시선, 익숙함을 빌미로 모른 척 등을 돌리고 정수기를 닦는 아줌마. 모두 무례했다. 이 무례함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게 BTS가 요즘 선전 중인 정수기예요. 정수기능만 있어서 저렴하고 크기도 지금 것보다 훨씬 작답니다. 한 달에 렌탈 비용이..."


BTS 얘기가 나오자, BTS 사진 한 장 갖다 준 적이 없는 코디 아줌마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럼 그럼~'하는 표정으로 웃는다. 뭐가 그렇다는 건지.


낯선 이가 낯선 목소리로 낯선 펜을 들고 팜플렛에 동그라미를 친다. 인쇄물 속 제품들의 실루엣이 유려하다. 요즘은 물건 디자인을 잘 빼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른 기업들 것도 마찬가지겠지. 광고에서, 친구 집에서 봤던 LG 정수기가 떠올랐다.


팀장은 팜플렛을 앞뒤로 넘기며 이 분야의 프로라는 듯 자신 있게 렌탈 기간에 따른 월납비를 이야기했다. 나에게 맞는 제품이라고 권하며 기능을 설명했다. 이해하기 어렵다. 저렴함의 기준을 모르겠다. 빠르게 지나가는 숫자들을 어림잡아 1년 단위로 계산하고, 또 이를 렌탈 기간만큼 곱해 본다. 얼핏 암산한 값이 제품의 기능에 비해 너무 비싸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저렴하죠?"


눈이 마주친 팀장의 얼굴에는 의외로 주름이 많았다. 나와 비슷한 연배일까? 집에 아이는 있을까? 나처럼 이 사람도 워킹맘일까. 계약을 하면 얼마만큼의 인센티브를 받을까. 코디 아줌마에겐 얼마나 돌아갈까. 모르겠다.


"그렇죠, 고객님?"


생각을 즈려밟듯, 확인 사살하듯이 그녀가 묻는다.


"뭐.. 그런 것 같네요."


새 제품인데도 기존에 쓰던 것과 기능이 같은데 더 싼 게 있다. 새 제품으로 재계약하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든다. 코디 아줌마가 내가 망설이는 걸 눈치챘는지 한 마디 거든다.


"아이고~ 뭘 잘 모르겠으면 그냥 추천한 걸 해요. 그게 제일 낫다니까!"


뭘 잘 모르겠으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가 잘 몰랐던 거다. 이 당황스러움과, 무례함에 대해 제대로 대처조차 못하는 어리석음은 무지로 인한 것이었다. 무지로 인해 나는 고통받는 중이었다.

낯선 물건에 짓눌린 식탁이 정신 못 차린 주인을 미덥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관리하는 인력이 중간에 낀 제품이 어떻게 저렴할 수 있겠는가. 인건비가 가장 비싼데 어떻게 온라인으로 바로 구매하는 것보다 쌀 수 있겠는가. 당연한 것이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미루고 있었다.

소위 전문가라 자처하는, 혹은 전문가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손을 놓고 있었다.


언젠가는 렌탈 시스템에 대해 알아봐야지,

언젠가는 자가 관리하는 제품으로 갈아타야지,

언젠가는 두 달에 한 번 사람이 오는 것에서 해방되어야지,

라고 5년 내내 생각만 했었다.


알아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만 하루만 투자해도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알지만, 미루는 날이 늘어날수록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어렵고 요원하게 느껴졌다. 내일 해야지를 수 백번 반복하니 렌탈 만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례한 사람과 낯선 사람이 가고 난 집은 더 휑하게 느껴졌다.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져 기분도 나빴다. 싱크대의 그릇을 정리하며, 세탁기를 돌리며 언젠가 황심소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니까 무서운 거예요'


무서운 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일상 속 사소해 보이는 것이 '무서운 것들'이었다.

10년이 넘은 렌탈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 오랜 기간 대면한 코디 아줌마의 영업용 멘트를 거절하는 것, 몇 달째 미루고 있는 운전면허증 갱신을 실행에 옮기는 것, 주방의 깜빡거리는 LED 등을 교체하는 것, 자동차 정기검진을 받는 것, 아이의 한자 공부를 직접 시킬 방법을 찾는 것 등등.


더 이상 도망가지 않기 위해 날을 잡아 정수기, 연수기, 청정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요즘은 유튜브로도 정보를 얻기가 쉬웠다. 실물을 써본 사람들이 영상까지 올려놓는 이 좋은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인가.


코디 아줌마에게는 정중하게 문자를 적어 보냈다. 지금까지 감사했다고, 좋은 제품이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니 아줌마도 흔쾌히 알았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가장 마음이 부담이 컸던 부분이 순식간에 해결되니 허무할 지경이었다.


그로부터 약 2주가 지난 지금, 주방엔 일시불로 산 20만 원도 채 안 되는 작고 예쁜 직수 정수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커피 머신과 모양이 비슷해서 보기도 좋고, 싱크대 위 공간이 넓어져서 한결 사용하기 좋다.

청정기는 요즘 유행하는 둥근기둥 모양으로 바꾸었다. 청정기 하면 떠오르는 대기업의 제품을 사려다가 가성비 좋은 제품으로 샀다. 정수기와 청정기 모두 자가 관리가 가능해서 누가 집에 올 일도 없다. 새 가전이 자리 잡은 집이 훤해 보이는 효과까지 있다.

연수기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머릿결이 푸석해질까 봐 걱정됐었는데 욕실 구석에 지박령처럼 있던 헤어 오일을 바르며 해결되었다.


운전면허증 갱신도 휴대폰으로 순식간에 끝냈다. 건강검진 결과가 자동으로 연계되어서 날짜에 맞춰 경찰서에 찾으러 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런 작은 경험들을 감히 '성공 경험'이라 부르고 싶다.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할 것 같았고, 견고해 보이기만 했던 벽들은 내가 굳이 도망가며 만든 것들이었다. 요 근래의 작지만 큰 성공경험을 통해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무서워하는, 미루는 것들은 무엇인가?

도망갈 만큼 대단한 것들인가?

다른 사람이 해낸 일을 내가 못할 리가 없다.


자, 이제 벽들을 부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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