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내가 나에게 보낸 사자(使者)

2023.10.28.

by 하얀밤


일주일 전부터 피부에 뭔가 나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짤 수도 없는 붉은색의 뾰루지들이었다. 왼쪽 이마부터가 시작이었다. 제법 눈에 띄게 올라온 세 개를 화장과 머리카락으로 가렸다.


다음날 아침,

그 옆에 두 개가 더 났다.


마침내 다음 날.

만지면 아픈 왕뾰루지가 턱에 났다. 뻥을 좀 쳐서 구슬만 한 그 녀석은 턱 속에서 기를 모으고 있었다. 곧 화를 내며 동그랗게 솟아오를 참이었다. 기운으로 보아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슬슬 거울 보는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볼에서까지 녀석들이 고개를 들자 비상등이 켜졌다. 뾰루지의 원인 분석에 들어가야 했다.


욕실 장을 열자마자 얼마 전 사들인 비피다 성분 앰플이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 전부터 발랐던 것 같다. 그래, 네 이놈. 네가 원인이었구나! 그 유명하다는 에스*로더 갈색병의 핵심 성분만 뽑아서 담백하게 제조했다길래 믿고 샀더니! 기대했던 물광은커녕 뾰루지를 안겨주다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1+1으로 두 병이나 산 앰플이지만 피부에 안 맞으면 어쩔 수 없었다.

그날부로, 앰플은 구석으로 밀려났다.


이미 올라온 뾰루지를 처치하기 위해 잠자기 전, 징크 앰플을 얼굴에 듬뿍 올렸다. 징크 앰플은 트러블을 빠르게 가라앉힌다. 뾰루지의 원인을 없앴으니 이제 더 이상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적군의 암호를 해독한 것 같은 기쁨에 취하며 의기양양하게 잠이 들었다.


이쯤 되면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나는 승리하지 못했다. 뾰루지는 인해전술을 채택한 듯했다. 뾰루지의 특성상, 쪽수를 늘이는 것이 가장 잔인한 공격법이다. 이미 생긴 애들과 인수인계하듯이 비슷한 녀석들이 빠르게 수를 늘려갔다.


멘붕이 왔다.

비피다 앰플이 문제 아니었나? 지금까지 얼굴에 발랐던 화장품들의 성분을 떠올려봤다.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로 바꾼 화장품이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몸에 바르는 순한 성분의 로션을 얼굴에 치덕치덕 발랐다. 몸에 바르는 로션을 얼굴에 바르는 것은 무기력함의 극단적인 표현이었다.


다음날 아침, 두 눈을 반쯤 감은채 욕실에 들어갔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거울을 비껴보며 양치질을 했다. 머리를 질끈 묶고, 머리띠를 하고 세수를 하기 위해 손에 받은 물을 얼굴에 묻히는 순간,


어?


피부가 매끈한 것이 아닌가!

뾰루지들이 늘어나지 않았다.

있던 놈들도 사라지고 있었다.

뭐지?

도대체 뭐지?


순간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깨달음이 밀려왔다.


'보습'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며 습도가 낮아졌다. 낮아진 습도로 인해 피부가 건조해졌던 것이다. 건조할 때마다 내 피부는 트러블을 겪어왔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발랐던 로션이 밤새 건조함을 잡아주었다. 충분한 보습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 그것을 잊고 있었다.


기본 중의 기본.

여섯 글자가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피부에는 충분한 보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한 채 좋다고 소문난 성분의 화장품들을 바르고 있었다. 비피다니 판테놀이니, 징크옥사이드니 모두 반찬 같은 것들이었다. 밥 없이 반찬만 퍼먹고 있었다.


충분히 보습을 하게 되면서 뾰루지들은 서서히 사라졌다.

주인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였던 것처럼 징징거림 하나 없이 깨끗하게 물러났다.





깨끗해지는 피부를 보며 요근래 부쩍 나를 괴롭히는 불안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자꾸 소심해지고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서도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가고 있었다. 직장에서 한 팀을 이끄는 위치에 있으면서 부하직원이 원하는 것과 윗사람의 의견 사이에서 위태롭게 시소 타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부터든 미움받는 것이 두려워서 내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나 같은 아이디얼리스트(황상민 박사의 WPI심리검사 결과 유형 중 하나. 아이디얼리스트에 관한 책리뷰는 여기)인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병이 든다. 현실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기질이 반기를 든다. 무의식에서 비상등이 켜진다. 최근 아이들에게 짜증을 많이 내고, 다리 저림이 심해진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이디얼리스트는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을 확인할 때'가 제대로 잘 사는 때라 했다.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자신답지 못한 삶을 살게 하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덮기 위해 수다도 떨어보고, 잠도 자 보고, 맛있는 것도 먹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기본'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뾰루지가 붉은 기를 거의 잃어가던 날,

상관의 방문을 두드렸다.


할 말이 있다는 나를 앉으라고 하는 그의 정면에 앉아서

스스로를 못난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었던, 가슴 깊이 눌러놓았던 말들을 풀어냈다.

중간관리자로서 힘들었던 점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나를 그는 충분히 이해해 주었다.


그래, 이게 나였지.

잘했어. '나라는 사람'.


그날 저녁 세수를 하며 희미하게 남은 뾰루지의 흔적을 손으로 쓸었다. 보습크림을 꼼꼼하게 바르며 어제보다 불안을 덜어낸 나는 그제서야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뾰루지는 내가 나를 위해 보낸 사자使者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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