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쿠인노 마에니 니모쯔오 아즈케테 모라에마스까~" (체크인 전에 짐을 맡길 수 있나요.)
영상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저 말을 하는 나를 상상한다. 장소는 아마도 호텔일 것이고 양손에 캐리어 손잡이를 하나씩 쥐고 있겠지. 아이들 중 하나는 내 팔을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아이가 좀 더 크면, 시간적인 여유가 더 생기면, 그때, 나중에, 나중에를 반복하다 보니 마흔이 훌쩍 넘었다. 일본 여행을 가서 필요한 말 몇 마디는 할 수 있지만 길어지는 안내 방송을 듣는다거나, 긴급한 때 정확하게 의사 표현을 하기는 힘든 수준이다.
누군가 나에게 일본어 할 수 있냐고 물으면 '조금'이라고 대답해 왔다. 언젠가는 '응'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날이 오리라 생각하며.
하지만 '그때'는 도대체 언제 온단 말인가?
일본어는 고등학생 때 처음 접했다.
JPOP을 좋아하게 되면서 친구와 교련 시간에 일본어를 같이 공부했었다. (교련 선생님께는 죄송하다. 그래도 붕대감기 속도는 전교 1등이었다. 시범도 보였었다.)
대학생 시절엔 일본 드라마와 애니, 노래를 쉴 새 없이 보고 들었다. 좋아하는 일본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자막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기가 힘들어 무작정 봤다. 일본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같고 비슷한 표현이 많아 듣기 실력이 쭉쭉 늘었다.
본격적인 일본어 공부는 직장인이 된 뒤에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시기가 오니 일본어에 손을 뻗을 수 있었다.
뭔가를 배우려면 학원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법 이름 있는 학원에 등록을 했는데, 수업도 시작하기 전에 CD가 딸린 교재부터 몇 십만 원 치 사라고 했다. 지금 같으면 됐어요~하고 나오겠지만, 20대의 수줍음 많았던 나는 거절을 못했다. CD는 먼지만 뽀얗게 뒤집어쓰다가 약 10년 뒤 버려졌다.
시큰둥한 마음으로 다니는 학원은 재미없었다. 생동감 있던 일본어가 딱딱한 책 속에서 죽어있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 일본어가 싫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혼인 시절이 가장 시간적으로 여유 있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대중교통으로 시외 출퇴근을 하던 시절이라 많이 고단하긴 했다. 퇴근하고 오면 뻗기에 바빴고, 쉬는 날에는 일본 드라마를 봤다. 일본 드라마를 본 건 참 잘한 일이다. 외국어 리스닝 실력을 늘리는 데는 이만한 게 없는 것 같다.
결혼을 했으나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았다. 마음 둘 곳이 필요해서 다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한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일본어 능력시험인 JLPT 2급에 도전했다. 어휘와 한자가 만만치 않았지만, 간절함이 없어 설렁설렁 공부를 했다. 합격하면 좋고 불합격해도 괜찮다는, 떨어지기 딱 좋은 마음으로 시험을 쳤다. 그런 흐리멍덩한 정신상태였는데도 꽤 좋은 점수로 합격을 했다. 오랜 기간 쌓아온 리스닝 실력이 어휘, 독해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쌍둥이를 낳고,
육아와 직장일을 병행하며 십여 년이 지났다.
다시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 발단은 딸과 <바람의 검심> 영화를 보게 되면서이다.
내 젊은 시절을 수놓았던 인생 만화 <바람의 검심>.
20대에 수없이 봤던 만화책과 애니가 어느 날 멋지게 영화로 실사화되었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주인공 켄신은 극찬을 받았다. 사무라이 이야기여서 잔인한 장면이 많아 넘겨가며 봤는데도 딸이 홀라당 빠져버렸다. 영화 다섯 편을 몇 번이나 같이 보고 난 뒤, 이 녀석이 일본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켄신 (출처 : 네이버 영화)
딸과 서점에 가서 히라가나 가타카나 쓰기 책을 샀다. 아이는 공부하며 수시로 나에게 질문을 해댔다. 질문에 답을 척척 해주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한 달 정도 걸려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외운 딸은 어서 일본에 놀러 가고 싶다고 했다. 더 빨리 공부했으면 지난번 갔을 때 간판의 글자를 읽었을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딸이 냉장고에 붙여놓은 히라가나
이번 겨울에 일본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제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버벅거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창하게 말하는 엄마를 보여주고 싶었다. 앞서 말한, 일본어를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그때'를 현실로 만들 때가 이제야 온 것 같다.
일본어를 공부해야 하는 목표를 다시 정리해 본다.
1. 아이에게 유창하게 말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언가를 공부하고, 이루어내는 사람의 모습을 목격하게 한다. 이만큼 좋은 경험은 없을 것이다.
2. 한국어 교사라는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나는 퇴직한 뒤에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말을 전공했으니 일본어까지 유창하면 분명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3. JLPT 1급에 도전한다.
1급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하지만 공신력 있는 자격증을 따야 인정받기가 쉽다.
가장 빠른 시험일은 올해 12월 3일이다. 여기에 맞추기엔 빠듯해서 내년 7월을 목표로 해야겠다.
오늘도 우리집엔 일본어 듣기가 울려 퍼진다.
아들은 일본어 단어가 욕처럼 들린다고 낄낄거린다. 딸은 'ない(나이)'가 붙으면 부정하는 말임을 어렴풋이 감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