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즈음, 우연히 밀리의 서재 무료 구독권을 받았습니다. 12만 권의 책이 수록되어 있다는 말에 설레는 마음으로 앱을 설치하고평소 읽고 싶은 책을 적어놓은 메모를 꺼냈습니다.
첫 번째 책 제목을 검색하니, 없습니다.
흠?
다른 책 제목을 넣어봅니다. 없습니다.
흠..
'12만 권의 베스트셀러가 담겨있다'는 광고 문구가 검색하는 손을 머쓱하게 했습니다. 제가 이상한, 비주류가 된 것 같았습니다.
밀리의 서재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삐걱거렸지만 다행히 원하는 책을 몇 권 찾을수 있었습니다.
처음 읽은 책은 오래전 도서관에서 빌려읽었던책 중 여운이 남았던 책이었습니다. 다운로드를 하고 다시 한번 빠르게 훑어보니 그때의 감회가 살아나 참 좋았습니다. 무료로 이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다니!
밀리의 서재에 대한 호감도가 +1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 책에서 시작됐습니다.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입니다. 이 책을 밀리의 서재로 읽기 시작한 지 어언 석 달이 넘어간다는 것으로 앞으로 할 이야기의 운을 띄워봅니다. 책 한 권을 석 달이나 잡고 있게 된 이유, 그리고 지금도 제 휴대폰 바탕화면의 '읽던 책' 위젯에 저 책이 버젓이 떠 있는 이유는요.
첫 번째, 폰으로 책을 본다는 것이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폰이라는 기기의 화면 속 활자가 너무 가벼워 보였습니다. 이게 책인지 지나가는 유머인지 분간하기 힘든 시각적인 가벼움. 손에 들린 것이 묵직한 종이가 아니라 평소 사진을 찍고 가벼운 가십거리 같은 뉴스나 읽던 기기라는 것이 활자가 주는 의미를 가로막았습니다.
밀리의 서재가 제공하는 활자 크기 조절과 문단 간격 조절, 상하 좌우 여백 조절이라는 편리한 기능을 활용해서 최대한 종이책처럼 보이게 조절해 봤는데 어느 순간 그 기능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요리조리 화면 바탕색을 바꿔보고 폰트도 바꾸다 보면 책 읽을 수 있는 여유시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집중해서 좀 보자!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읽기 시작하면 화면 구석에 있는 페이지 숫자가 보입니다. '292/559'라는 숫자가 반 정도 읽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총 페이지 수가 500이 넘어가는 게 좀 이상합니다. 제가 본 실물 책은 400쪽 남짓으로 보였거든요. 세로 화면으로 보다가 가로 화면으로 바꿔봅니다. 화면을 가로로 하면 2단으로 나와서 좀 더 책처럼 보이거든요. 어라, 페이지 수가 바뀝니다? '548/1052'??? 이게 뭡니까!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면 처음부터 읽을지 말지 고민부터 했을 텐데! 큰 산을 마주한 것 같아 포기하고 싶어 집니다. 얼른 화면을 세로로 돌립니다. 다시 500쪽짜리 책이 되었습니다. 자꾸 바뀌는 페이지수를 보니 괜히 심드렁해집니다. 기계가 계산해서 실시간으로 바뀌는 페이지 숫자가 내가 읽고 있는 책에 더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두 번째, 자꾸 딴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폰이라는 기기가 손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알림들이 보입니다. 카톡 메시지부터 온갖 앱들이 보내온 새 소식들이 자기를 먼저 읽으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그냥 넘겨도 좋을 것들인데 꼭 하나씩은 지금 읽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보입니다. 클릭할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이 얼마나 길까요? 손가락이 먼저 반응해서 눌러버립니다.
폰으로 하고 있는 활동들이 워낙 많다 보니 독서가 뒤로 밀리는 순간이 너무 잦습니다. 딸이 냉장고에 비요뜨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화면을 전환해서 쿠팡으로 들어갑니다. 화면 상단에 은행 앱 알림이 오면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이 옆에 와서 애교를 부리면 그 순간을 남기고 싶어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찍습니다. 폰이라는 이 기계! 기능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폰을 탓해 보지만 결국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린 거겠죠. 네, 제 태도가 문제인 겁니다.
음, 정말로 문제인 걸까요?
저의 의지력 수준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e북 리더기를 구입하는 사람들을 통해 할 수 있습니다. 종이책처럼 집중이 잘 된다고 합니다. 밀리의 서재 앱 사용이 e북 리더기 구입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맞이해야 할까요? e북 리더기를 사면 저는 더 많은 책을 e북으로 읽을까요? 글쎄요. 종이책이 주는 물리적인 무게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의 느낌까지 독서의 일부였다는 걸 깨달아 버렸는데요.
밀리의 서재 앱 무료 사용 기간이 끝나갈 무렵, 티몬에서 1년 구독권 할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40% 이상 할인이 들어간 구독권을 덜컥 구매해 버렸습니다. 도전하는 마음으로요. 종이책을 훨씬 사랑하지만 독서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전자책과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겨우 손이 닿을 듯 말듯해진 전자책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습니다.
밀리의 서재는 저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앱 화면에 익숙해지면서 삼십 분 이상 책을 읽는 때도 있고, 오디오북도 자주 활용합니다. 아이들과 아직도 한 방에서 같이 자는 요즘(언제쯤 각 방을 쓸지..) 줄글로만 읽기엔 좀 심심할 수 있는 고전들을 오디오북으로 들으며 잠이 듭니다. <어린 왕자>나 <노인과 바다>는 효과음까지 더해져 꽤 재미있었습니다. 어린 쌍둥이를 재우기 위해 어둑한 방에서 백희나의 그림책을 최대한 실감 나게 읽으려 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며 새삼 변한 세상에 감탄을 합니다. 그 당시에도 오디오북이 있었다면 제 목소리를 대신해서 오디오북을 틀어줬을 거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아날로그가 기본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요즘을 살아가며 어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변화를 자연스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습니다.그러고 보면 직장에서도 대부분의 공문을 전자시스템으로 처리하고 있고 이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17년 전만 해도 공문을 인쇄해서 결재판에 올려서 직접 사인을 받으러 다녔는데요. 이제는 세대를 불문하고 직장의 모든 구성원이 전자결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변화가 스며드는 건 이런 거겠지요.
언젠가 밀리의 서재 같은 전자책도 전자시스템의 공문처럼 익숙해지는 때가 올 겁니다. 나이가 들어 노안이 더 심해지면 폰트 크기를 마음껏 조절할 수 있는 전자책만이 유일한 독서수단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