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 경험과 감각을 믿지 마세요

'김상욱 <김상욱의 양자 공부>'를 읽고

by 하얀밤


문과 출신이 겁도 없이 양자 역학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김상욱 교수님이 쓴 책이어서 읽고 싶었고, 이 분이라면 저처럼 양자 역학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이해시켜 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통했습니다. 저도 감히, 이제 양자 역학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지 완전히 '이해'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위로가 되는 문장을 먼저 짚고 넘어갈까요.

양자 역학은 어렵다. 이 글을 읽으며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간혹 양자 역학을 한 번에 술술 이해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면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거나 정신 병원에 가야 한다. 대개는 후자다.

*양자 역학의 창시자 닐스 보어는 "양자 역학을 연구하면서 어지럽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 못 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 김상욱 <김상욱의 양자 공부> p251

이 책의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책 한 권을 낑낑대며 읽었는데도 혼란에 빠진 독자를 위로하는 다정한 교수님의 면모를 느낄 수 있지요. 저는 이론 물리학 전공도 안 했고, 병원도 안 갔기에 안심이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에게 물리는 배움이라기보다는 고통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무섭기도 했고 뉴턴의 법칙인가 뭔가는 아무리 외워도 문제에 적용하기 힘들었습니다. 수능 한 달 전까지 물리 부분만 포기하고 있다가 물리가 발목을 잡아서 수능이 임박했을 때 기초 참고서를 사서 급하게 공부했던 기억도 납니다.


습자지처럼 얇았는데 거의 다 휘발되기까지 한 물리 지식으로 이 책을 읽기는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넘을 수나 있을까 싶은 거대한 과속 방지턱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내용이 계단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앞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페이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두 페이지를 잡고 한참을 씨름하기도 했습니다. 끝까지 읽고 나서 인상적인 부분들을 필사하는 과정을 거치며 다시 한번 더 읽다시피 하니 양자 역학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적어도 두 번 이상 읽어야 하는 책이었던 겁니다.


과학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관되게 들려주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으니, 바로 경험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우주는 팽창하며, 생명은 진화한다. 빛의 이중성은 경험과 직관의 빈약한 근거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 김상욱 <김상욱의 양자 공부> p65


저는 빛이 입자이자 파동인지도 몰랐습니다. 배운 적이 없었거든요. 고등학교 이과 학생은 이 정도는 배운다고 합니다. 배경 지식이 이렇게나 부재한 상태에서 맞이하는 양자 역학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입자이자 파동인 게 있다고?

빛이 그렇다는 것도 신기한데 전자가 그렇다고?

전자가 원자 주변을 돈다는 건 들었던 것 같은데 도는 게 아니었다고?

전자를 측정하는 순간 파동이냐 입자냐가 결정된다고?

측정이 대상을 만든다고?


상식 같은 경험에서 탈피하니 이거 참, 측정하는 사람이 神급으로 상승하는 것 같습니다.

관찰자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순간마다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다중 우주' 이론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미 상식을 벗어났으니 뭔들 상상하지 못하겠습니까.

'다중 우주'야 영화나 소설에서 접해본 장면이라 조금 익숙하긴 했습니다. 다른 우주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며 배시시 웃어보기도 했고요.




모든 경험과 상식과 감각을 버렸는데도 큰 충격으로 다가온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실라르드 엔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정보를 물리적인 엔트로피로 간주하지 않으면 열역학 제2법칙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 버릴래, 정보를 물리적인 것으로 간주할래? 법칙을 버리기는 싫으니 이제 정보가 당당히 물리학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 김상욱 <김상욱의 양자 공부> p245

이제는 '측정한다는 행위를 한다'는 '정보'가 물리적인 에너지라고 합니다.

쪼~끔 더 구체적으로 기술된 부분을 옮겨봅니다.(라고 쓰고 다시금 혼란에 빠진 저를 달래기 위해서라 읽습니다.)

정리해 보자. 실라르드 엔진에 따르면 정보를 이용하여 일을 할 수 있다. 일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물리의 모든 것이다. 정보는 에너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물리적 실체다. 여기서 말하는 정보란 양자 측정으로 얻어진 객관적인 것이다. 양자 역학은 상태를 기술한다. 보어는 정상 상태를 도입해 양자 역학의 문을 열었다. 양자 역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상태를 얻을 확률이다. 확률은 정보로 정량화된다. 이처럼 양자 역학은 기본적으로 정보를 기술하는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렘페의 실험은 양자 역학의 측정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정보라는 것을 보여준다. 휠러의 지연된 선택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결정하는 것이 추가적 측정 여부, 즉 추가 측정의 정보임을 보여 준다. 이것은 양자 역학에서 측정이 대상 자체를 만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 준다. 결국 양자 역학으로 바라본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논리적으로 명확한 귀결이라기보다 그럴듯한 추론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 김상욱 <김상욱의 양자 공부> p248

(혹시 '실라르드 엔진'이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은 이 책을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저에겐 설명할 역량이 없습니다.)


'정보'가 '일'을 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을 처음 해 낸 사람도 대단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대단하고 이것을 일반인에게 이해시킨 것도 대단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의 이해 수준과 깊이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위태로움을 달랬었기에 이 느낌이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네요.


문과모드로 감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발상의 도약을 이뤄낸 과학자들이 존경스럽다.
2. 남들이 NO라 할 때 YES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한다.
3. 양자 역학은 내 몸에도, 내가 마시는 공기에도, 내가 접하는 세상 모두에 적용된다.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4.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즐겁다.


결론은 '즐겁다'입니다.

즐거운 감정이 책을 끝까지 읽는 원동력이 되었고

김상욱 교수님이 책의 말미에 추천한 다른 책들을 읽게 할 추진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점심 메뉴를 이야기하듯이 양자 역학에 대해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많은 상상들이 현실이 되어 있을까요.

현재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을까요!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특히나 즐거웠던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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