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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준현 Sep 13. 2020

무화과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는 담백함

8월 끝자락의 어느 날, 미친 듯이 무화과가 먹고 싶었다. 인터넷 쇼핑을 알아보니 그날따라 무화과가 품절이었고, 다음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나는 무화과를 찾아 동네 마트 탐방을 했다. 마트 세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도곡시장에서 무화과를 발견했을 때 기뻐서 폴짝 뛸 뻔했다. 그렇게 얻은 무화과 한 박스엔 약 16개의 무화과가 들어있었고, 오래 두면 무르기 십상이기에 1주일 동안 집에서 무화과 파티를 했다.

무화과는 8-11월이 제철이라고 한다. 여름의 끝자락 마트에 나가보면 싱싱한 무화과를 한 박스씩 팔고 있는데, 어쩌면 내 무의식이 제철을 알아차리고 그렇게도 무화과를 찾았나 싶다.


무화과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 대학교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그 전엔 학창 시절 교회를 다니는 친구를 통해 얼핏 들은 적 있는, 머나먼 타지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과일이었다. 대학교 앞 카페에서 무화과 파운드케이크를 팔았다. 어쩌면 무화과 잼을 바른 토스트 인지도 모르겠다. 이십 대에 들어서 처음 접한, 파운드와 잼 속에 묻힌 이방의 과일은 달짝지근하면서 씨가 톡톡 씹히는 독특한 풍미를 자아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취업 후 한 브런치 카페에서 싱싱한 무화과를 맛볼 일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무화과는 찐득하고 달큼하면서 쫄깃한 맛이었는데, 처음으로 온전한 무화과를 접했을 때 부드럽고 밍밍한 의외의 맛에 놀랐다. 이 과일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이후 몇 번, 먹으면 먹을수록 무화과의 은은한 매력을 알게 됐다.

8월 말 집에서 해먹었던 무화과 요리. 부라타 치즈, 그릭요거트, 리코타치즈, 모짜렐라 치즈, 프로슈토 등을 곁들여 먹었다.

초록과 자줏빛이 섞인 얇은 표피 안에 감싸진 말랑한 과일. 하얀 테두리 안 콕콕 씨가 박힌 선홍빛 과육이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어여쁜 모습 덕에 대충 투박하게 잘라 그릇에 옮겨 담기만 해도 음식의 비주얼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주고, 먹는 이에게 그럴싸한 식사를 하고 있다는 기분을 선물한다.


껍질을 깨끗이 씻고 사등분 한 반달 모양의 무화과를 한 입 먹으면 담백하면서 절제된 단 맛을 느낄 수 있다. 아무 맛이 없는 것 같지만 잘 느껴보면 여름 끝자락과 가을의 초입을 알리는 은은함이 묻어나 있다. 너무 달지도 시지도 않지만 그만의 풍미가 있고, 안에 박혀있는 씨앗들이 톡톡 씹히며 식감을 살린다. 망고와 같은 열대 과일이 강렬한 여름 태양의 맛을 품고 있다면, 무화과의 맛은 서늘하고 부드러워진 가을 햇빛과 그 아래 익어가는 단풍을 닮았다.


무난한 맛 덕에 어떤 메뉴와도 잘 어울린다. 특히 서양 식재료와 잘 어울리는데 빵, 치즈 등의 고소함, 초록잎 야채의 쌉싸르함, 요거트의 시큼함, 프로슈토나 하몽의 짭짤함과도 잘 어울리니 만능 재료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합은 두 가지인데 첫째, 그릭요거트와 잘 어울린다. 그릭요거트 적당량과 무화과를 한 입에 쏙 넣어 음미해보면 그릭요거트의 시큼함과 차진 식감이 무화과의 달곰함과 부드러움과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여기에 꿀을 살짝 얹어주면 달콤함이 배가 된다.

둘째, 무화과에 프로슈토, 모짜렐라 치즈, 그리고 초록잎채소를 곁들여 샐러드를 해 먹으면 다채로운 맛이 인상 깊다. 올리브 오일에 발사믹 식초를 살짝 섞은 드레싱을 샐러드에 골고루 뿌려주면 개성 있는 각각의 맛에 풍미가 더해져 한 층 깊어진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어느 금요일 저녁 이 샐러드를 먹으며, 눈을 감고 천천히 모든 재료를 음미하며 혼자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가을 초입, 천천히 스며드는 계절을 느끼며 눈과 입이 만족스러운 한 끼를 원한다면 무화과 한 박스를 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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