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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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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나 Oct 24. 2019

그녀가 나를 훔쳐갔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특정한 장소의 모습이라든지, 그 날 같이 먹었던 음식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하다가, 상대방이 말하면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좋지 않은 기억력으로 황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소설을 아주 유쾌하게 읽고 있다고 말했는데, "너 그거 나랑 같이 영화로 봤잖아!" 하는 대답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럴 리 없다. 내용 자체를 처음 보는 것이며, 영화 예고편을 다시 돌려보아도 생소한 장면이라고 말해도 "너 원래 기억력 안 좋잖아"하는 답답한 소리만 들었다. 억울한 마음에 짜증이 났지만 아무렴 어떠랴! 노인이 창문을 넘은 사실을 미리 알았든 몰랐든 내 인생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 것을.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모호한 대답으로 화제를 돌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영화를 봤냐 안 봤냐는 사소한 문제가 아닌, 내 삶의 존재 여부와 의미를 결정짓는 질문이었다면 내 반응은 달라졌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엄마를 잃어버린 나에게 엄마와의 추억 어린 기억을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거 내 기억이야. 너가 나를 동경해서 그게 너라고 만들어서 기억하는 거야"라고 한다면? 억울하고 분통해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분통 터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MBC 드라마 <황금 정원>의 은동주다.

 극적 요소가 드라마의 주 재료이긴 하지만, 주말 특별극에는 유달리 극적인 요소가 더 많이 첨가된다. 놀거리 많은 주말이기에 눈길을 끌 요소가 필요하고, 무료한 주말이기에 스릴이 필요하다. MBC <황금 정원>은 매주, 매회 예측하기 힘든 꿀잼 결말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황금신부>, <애정만만세> 등의 화려한 경력을 가진 박현주 작가는 극적인 전개의 노련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인생을 도둑맞은 여자라는 흥미로운 소재의 <황금 정원>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기구한 네 남녀의 운명

왼)은동주(한지혜),차필승(이상우)/ 가운데) 최준기(이태성),사비나(오지은)/ 오)사비나와 진난희(차화연)회장

  주인공들의 운명은 드라마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만들기도 힘들 정도로 얽히고설켜있다. 주인공 은동주는 불치병 환자를 돕는 모임인 '황금 정원'이 주최하는 반딧불 축제에 갔다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고아원에서 자라게 된다. 은동주가 성인이 돼서 그렇게 찾고 싶은 엄마는 사실 은동주의 엄마가 아닌 계모였고, 계모의 친딸인 사비나를 은동주로 살게 한다. 

 그렇게 한 여자의 삶을 빼앗은 사비나는 '황금 정원'의 후원자인 진난희 회장의 며느리로 들어가 승승장구한다. 사비나는 사실 예전에 결혼을 한 적도 있는데, 전남편을 현재 남편인 최준기가 사고로 죽였다. 그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 차필승은 은동주의 연인이다. 형사 차필승의 아빠는 차 박사라는 인물로 은동주가 엄마를 잃어버린 '황금 정원' 행사에 참석하려다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런데 사실 차 박사를 친 사람은 사비나의 엄마이자 은동주의 계모인 것. 전생에 한 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네 남녀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비밀들로 매회 드라마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은동주의 계모이자 사비나의 엄마인 신난숙이 있다. 사실 신난숙은 <황금 정원>을 보면서 주인공들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다. 개성 강한 외모의 정영주는 신난숙이라는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 작품에 활력을 더한다. 사실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주인공보다 악역이 도맡는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강력한 악역의 존재가 서사를 이끌어가는 풀어야 할 숙제이며, 주인공을 빛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팬텀> 등으로 유명한 정영주가 연기하는 신난숙은 강력하다. 감금이나 사기, 살인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신난숙. 그녀가 왜 은동주의 삶을 빼앗아 자신의 딸에게 주었는지 그 이유가 바로 이 드라마의 키 포인트다. 그리고 이제 그 비밀이 베일을 벗으려 하고 있다.        

  

 나를 찾아가는 험난한 여정

 자신의 삶을 빼앗긴 여자 은동주는 약한 듯 강인한 외유내강형 캐릭터다. 계모와 사비나의 계략으로 한없이 억울한 상황에도 은동주는 절대 지지 않는다. 아빠를 잃은 아이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키워줄 정도로 따뜻한 마음씨도 가지고 있다.  

  그런 은동주에게 남자 친구 차필승이 '이제 과거는 잊으라'라고 한 적이 있다. 은동주가 엄마가 계모였던 사실을 모른 채 엄마를 마침내 찾게 되었지만 차가운 엄마의 모습에 눈물을 터트릴 때였다. '현재의 행복한 모습으로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남자 친구 차필승. 하지만, 은동주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과거의 비밀을 파헤치며 자신을 찾아가는 은동주의 여정은 매회 쉴 틈이 없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참으로 험난하다. <황금 정원>을 보다 보면 은동주가 그냥 과거나 엄마 따위는 잊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와 결혼해 즐겁게 살면 되지, 뭐 하러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의구심도 든다. 

 누군가 나를 굴복시키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찾는 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일. 은동주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트루먼쇼>가 생각났다. 트루먼이 세상에 나가는 것을 모든 제작자와 스탭이 불과 물로 막아보지만,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와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처럼. 온갖 계략에도 과거의 나를 꼭 찾아서 과거-현재-미래를 가진 진정한 자신을 완성해가려는 은동주의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자신을 완성해 자아를 실현해가는 인간의 숙명이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은동주까지 치열하게는 아니더라도, 나도 조금 더 완성된 나를 만들기 위해 분발해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된다.

 <황금 정원>은 60부작으로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드라마의 가장 재미있는 파트는 결말이다. 은동주가 빼앗긴 삶을 되돌려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는 해피엔딩을 맺을 수 있을지, 빅재미를 위해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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