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려고 쓴 게 맞아. 그걸로 충분히 경외로워.
며칠에 걸쳐 정성을 들여 글이 하나 완성됐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그 글을 꺼내보니
이런, 읽기 싫은 글이다.
그러려고 쓴 건 아닌데 어쩌다 읽기 싫은 글을 쓰게 된 걸까?
실망하기도 전에 사실 그냥 쓰려고 쓴 게 맞다는 속 마음이 드러난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서 내려놓으려고 쓴 게 맞다.
'내려놓고 마음이 가벼워졌으면 됐지 뭐'
나를 위로한다.
문뜩 책꽂이에 책들로 눈이 갔다.
읽으려고 샀는데 읽지 않고 책꽂이에 쌓아둔 책들 역시
언젠가 읽게 될 새 책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에게 피어올라 이미 죽은 글의 무덤 같다.
지혜와 역사가 담긴 한 인간의 생명이 꺼지듯
생각이 왕성한 심사숙고를 멈추고 생각에서 벗났다는건 그 생각의 생명이 꺼진게 아닐까?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속절없이 시들어 사라지고 탐스러운 열매가 줄기에서 떨어져 썩어가듯
누군가 다시 읽히지 않아서 글이 죽는 게 아니라
글이 되는 순간 글쓴이 안에서 정화를 일으키며 화려하게 피어나며
제 할 일 다 하고 작렬하게 죽는 것이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속절없이 시들어 사라지고 탐스러운 열매가 줄기에서 떨어져 썩어가듯
만약 글이 누군가에게 다시 읽힌다면
그건 글의 생명이 그제야 살아나는 게 아니라
이미 뜨겁게 살아내고 죽은 생각의 흔적이
다음으로 이어져 내리는 흐름을 만나 양분이 되는 숭고함일 것 같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속절없이 시들어 사라지고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듯
탐스러운 열매가 줄기에서 떨어져 얼은 땅에서 새싹을 피우듯
글이 읽힌다는건 생각의 불활이 아닌
누군가 화려한 정화의 흔적이 다른 이의 양분이 되는 숭고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와 수많은 이들을 지나는 생각과 정화와 글에 경외와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