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 거실 한쪽 책장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낸 제리 부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책에 낀 먼지를 훑어냈습니다.
"이 책이 여기 있었구나!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 책은 바로 제리 부인이 몇 년 전에 옆집 할머니에게 전해 들은 여러 가지 요리 비법을 적은 메모장이었습니다. 토마토 수프의 맛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부인은 다시 그 레시피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이였죠. 그때, 책에서 '툭' 하니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작은 종이 꾸러미에 무언가가 담겨 있었습니다. 제리 부인이 종이 꾸러미를 주워 열어 보니 살구씨보다 옅은 색의 작은 씨앗 하나가 있었습니다. 종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왠지 아주 소중한 씨앗처럼 느껴진 부인은 얼른 빈 화분에 마당의 흙을 담고 씨앗을 심었습니다. 물론 물을 듬뿍 주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죠.
며칠이 지나, 조그맣게 새싹이 올라왔고 조금씩 자라는 새싹을 보며 제리 부인의 미소도 더 커져만 갔습니다. 한 달쯤 되었을까. 새싹은 더욱더 튼튼해져 넓은 이파리가 제리 부인의 손가락 두 마디보다 커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꽃봉오리가 올라오더니 어느 날 아침, 창가를 향해 꽃봉오리가 활짝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 창가로 걸어온 제리 부인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꽃봉오리 안에는 호랑나비만큼 작은 크기의 여자아이가 한 명 앉아 있었습니다. 부인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였죠. 제리 부인은 한동안 말도 하지 못하고 아이를 한참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악수를 청하듯 조심스레 아이를 향해 손을 내민 부인이 말했습니다.
"내 엄지손가락보다 작구나, 이제부터는 너를 엄지공주라고 불러야겠다!"
엄지공주는 제리 부인을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제리 부인은 엄지공주를 위해 작은 이불과 의자를 만들었고, 엄지공주가 좋아하는 색으로 옷도 여러 벌 만들었습니다. 엄지공주는 매일매일이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엄마와 무엇이든 함께 할 수 있었고, 엄마인 제리 부인에게 무엇이든 물어보며 세상의 신비로움을 하나씩 알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름달이 가득한 달빛을 보며 조금 잠이 오지 않는 엄지공주가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조금 열려진 창문 사이로 개구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정말 네가 엄지공주구나! 소문만 듣고 한번 와 봤는데."
엄지공주는 놀랐지만, 이내 차분하게 다시 물었습니다.
"넌 개구리지? 가끔 네가 우는 소리에 잠을 쉽게 못 잘 때가 있어."
개구리는 엄지공주 앞에 조심스레 다가가 앉았습니다. 사실은 지난밤에 만난 두더지 친구가 제리 부인 집에 매미만큼 작은 여자아이가 살고 있다고 해서 무척이나 궁금했던 개구리였습니다. 개구리와 엄지공주는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개구리는 다음에 두더지와 함께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며칠 후,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던 밤에 정말 개구리는 두더지와 함께 엄지공주를 찾아왔습니다. 엄지공주는 조금 졸린 눈을 비비며 친구들을 맞이했습니다. 엄지공주를 보자마자 두더지는 소란스럽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맙소사! 나도 얘기만 들었는데 정말 여기 살고 있구나!"
두더지는 엄지공주를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그리고 이내 물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엄지공주라고 불리는 거지? 넌 사실 공주가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두더지의 물음에 잠시 엄지공주는 당황했습니다. 사실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황해하는 엄지공주를 보고 황급히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제리 부인이 엄지공주의 엄마잖아. 엄마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엄지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두더지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공주는 어떤 건데?"
두더지는 엄지공주와 개구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공주라고 한다면 왕과 왕비도 있어야 하고, 그 왕과 왕비가 다스리는 어떤 나라와 백성들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엄지공주가 공주가 맞다면, 엄지공주의 진짜 엄마와 아빠인 왕과 왕비를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엄지공주는 이내 슬퍼졌습니다. 왠지 자신의 엄마인 제리 부인과 영영 이별을 해야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잠을 설치고 일어난 엄지공주는 기운이 좀 없었습니다. 그런 엄지공주를 본 제리 부인은 감기에 걸린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리 엄지공주가 오늘 기운이 없네. 어디 아프니?"
"엄마, 왜 내 이름은 엄지공주인가요?"
제리 부인은 살짝 미소지으며 엄지공주를 바라보았습니다.
"너무 작은 나의 딸이지만, 너무나도 소중하고 특별하기 때문에 '엄지공주'라는 이름이 생각났단다."
제리 부인은 엄지공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고민이 있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제리 부인은 작은 바구니에 엄지공주를 태우고, 뒷마당으로 나갔습니다. 독수리나 매가 엄지공주를 물어갈 수 있어서 보통 때 같다면 낮에 마당에 함께 나가는 일은 피했겠지만, 답답해 보이는 엄지공주에게 좀 더 넓은 곳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뒷마당의 텃밭에는 여러 과일과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상추, 호박, 토마토 그리고 감자와 옥수수까지! 바구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텃밭을 구경하는 것이 엄지공주는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밭에 물을 주고, 돌을 고르는 제리 부인의 얼굴도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엄마, 그런데 세상은 얼마나 커요? 어디까지 이어져요?"
엄지공주의 질문에 제리 부인은 굽어있던 허리를 한번 쭉 펴고, 하늘을 한번 쳐다봤습니다.
"글쎄, 엄마도 이 세상이 얼마나 큰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리 엄지공주와 함께 하는 이 조그만 세상이 엄마한테는 제일 크단다. 엄마한테는 이 작은 집과 마당 그리고 너만 있다면 이대로 그냥 왕국같아."
엄마의 말을 들은 엄지공주의 두 눈은 점점 커졌습니다.
"왕국이요? 이곳이 왕국이라고요?"
갑자기 엄지공주가 흥분하여 소리치는 모습이 제리 부인은 큰 소리로 웃으며 왕국이 맞다고 대답해줬습니다. 그러면서 더 덧붙였습니다. 어느 위대한 왕국과 바꾸자고 금은보화를 준다고 해도 절대 바꾸지 않겠다고 말이죠. 갑지가 엄지공주는 모든 의문이 해결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래, 이곳이 왕국이면, 우리 엄마는 왕비고, 나는 공주야! 왕과 왕비를 더 찾을 필요 없이 나는 이곳의 엄지공주라고!'
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하던 엄지공주는 너무 신난 나머지 바구니에서 뛰쳐나와 바로 앞의 밭에 앉아 있는 제리 부인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밭 근처 쪽 엉성한 자두 모양 크기로 움푹 파인 구덩이 속으로 그만 엄지공주의 몸이 빠지면서 구멍 안쪽으로 데구루루 굴러 들어갔습니다. 푹신푹신한 흙들 덕분에 다행히 팔과 무릎이 살짝 긁힐 정도였을 뿐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제리 부인은 혼비백산 구덩이 앞으로 뛰어왔습니다. 엄지공주가 빠진 구멍을 두 손으로 파면서, 소리쳤습니다.
"엄지공주야! 괜찮니? 괜찮아?"
엄마의 목소리에 바로 안심이 된 엄지공주는 굴러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엄마, 저 괜찮아요. 얼른 올라갈게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엄지공주는 땅속 깊이 처음 들어왔으나 너무나 시원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어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었습니다. 부스럭부스럭 안쪽 어딘가 통로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보니, 바로 두더지 친구였습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떻게 왔어?"
두더지는 놀란 눈으로 엄지공주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엄지공주는 구멍으로 떨어진 사연을 이야기하고, 그것보다는 좀 전에 제리 부인이 얘기한 '왕국'을 얘기하며 자신이 '엄지공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두더지 친구는 이 부분은 개구리와 다른 친구들까지 함께 얘기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엄지공주는 한 번도 인사를 나누지 않은 많은 친구들이 엄지공주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날 저녁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두더지의 등에 올라탄 엄지공주는 먼저 떨어진 구덩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만, 제리 부인이 심어둔 호박 넝쿨 한쪽 구멍으로 무사히 빠져나와 제리 부인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저녁 창가에 많은 친구들이 몰려왔습니다. 개구리, 두더지, 족제비, 올빼미, 왕거미와 호랑나비까지 인사를 왔습니다. 친구들은 엄지공주와 인사를 나누며, 사실은 엄지공주가 다치지 않게 낮과 밤 모두 지켜주려고 논의하고 있었다는 이야기했습니다. 갑자기 엄지공주는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왜 다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거야?"
그 얘기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아끼는 제리 부인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니까."
엄지공주를 만나고 난 후, 제리 부인은 점점 더 많이 웃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새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으며, 텃밭을 더욱 정성스럽게 가꾸고 모든 생명체들을 소중하게 대해줬습니다. 혹여나 밟을까 해칠까 조심하는 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던 거죠. 엄지공주는 친구들에게 제리 부인에게는 이 집이 곧 왕국이니까 자신은 공주가 맞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곳이 제리 부인의 왕국이라면 나는 밤에 이 주변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거야!" 올빼미가 나직이 말했습니다.
"나는 더 많은 꽃이 필 수 있도록 열심히 날아다녀야겠어. 이곳이 어떤 왕국보다 아름답게 말이지." 호랑나비가 말했습니다. 두더지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나는 텃밭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정해진 구덩이만 만들어 지낸다고. 꽤 어려운 일이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어."
그때 조용히 엄지공주를 응시하던 왕거미가 나섰습니다.
"근데, 이곳이 왕국이고 네가 공주라면 제리 부인은 왕비가 맞잖아. 음... 왕비에 걸맞은 표시가 있어야 할 텐데."
거미의 이야기를 듣고 다들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때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거미줄로 예쁜 목걸이를 만들어서 드리는 건 어때? 그렇다면 누가 봐도 왕비님이 되실 것 같은데!"
개구리의 제안이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장 시작해야 한다며 왕거미가 먼저 자리를 떠나고 나머지 친구들도 하나둘 자리를 떠났습니다. 일주일 후 왕거미와 친구들이 다시 엄지공주를 찾아왔습니다. 개구리와 두더지는 멋진 거미줄 목걸이의 양쪽 끝을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빛과 달빛에 비친 목걸이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정말 고마워. 거미야. 그리고 친구들 모두..." 엄지공주는 갑자기 눈물이 나왔습니다. 족제비가 다정하게 다가와 따뜻하게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엄지공주는 족제비 등 위에 올라탔습니다.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제리 부인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개구리와 두더지는 목걸이를 각각 입에 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제리 부인의 얼굴을 엄지공주는 따스한 눈빛으로 쳐다봤습니다.
"나의 왕비님, 이 목걸이를 받으세요. 저는 이제 정말 엄지공주예요. 이 왕국과 함께 우리 함께 오래 살아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거미줄 목걸이를 한 제리 부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호랑나비가 나직하게 외쳤습니다.
"엄지공주 만세! 우리 왕국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