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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Jul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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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길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벌레 먹은 나뭇잎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좋은 것

김남조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비통한 이별이나 

빼앗긴 보배스러움

사별한 참사람도

그 존재한 사실 소멸할 수 없다. 


반은 으스름, 반은 햇살 고른

이상한 조명 안에

옛 가족 옛 친구 모두 함께 모였느니


죽은 이와 산 이를

따로이 가르지도 않고

하느님의 책 속

하느님 필적으로 쓰인

가지런히 정겨운 명단 그대로


읽다가 접어둔 책과

옛 시절의 달밤,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 세상에 솟아난

모든 진심인 건

혼령이 깃들기에 그러하다.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풍경 달다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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