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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Aug 15. 2022

토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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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은 이같이 직업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지식의 형성 과정도 다르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것이 있었다. 

공통된 것이라기보다 운명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하는 편이 옳다. 

그것은 물론 부모대에서 또는 조부대에서 시작된 것이며

시세에 따라 부침하고 성쇠를 거듭한 최참판댁 명운과 무관하지 않고

일본의 침략으로 파생되는 사건과도 연관된다. 

만일에 최참판댁 청상 윤씨 부인이 동학의 장수 김개주에게

유린당하여 김환이라는 어둠의 자식을 낳지 않았더라면

김강쇠는 숯을 굽고 화전을 부치고 광주리나 엮으며 

무식한 산놈으로 살았을 것이다. 

만일에 영락한 무반의 후예 김평산이 

최참판댁 당주 최지수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칠성이 연루되어 처형되지 않았을 것이며

칠성의 아낙 임이네를 용이는 절망적 욕정으로 탐했을리 없고,

따라서 홍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호의 경우도, 아비는 형장의 이슬로, 

어미는 살구나무에 목을 매고, 불시에 고아가 된 한복이 

길가 잡초같이 자라지 않았더라면 영호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에 극악무도한 친일파 조준구가 최참판댁을 집어삼키지 않았더라면

그 집을 습격할 계기는 없었을 것이며

송관수가 산으로 들어가 의병으로 쫓기는 신세,

백정네 집에 몸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고

백정네 딸의 미모에 끌렸든지

보신을 위해 그랬든지 하여간 

영선네와 혼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광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일본의 침략이 없었던들,

김환은 항일의 자국마다 선혈인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강쇠 또한 개도되어 김환의 그림자로서

그가 떠난 뒤에도 중천에 사무친 그의 한을 짊어지고

따가운 뙤약볕을, 스산한 바람 속을 걸으며 살인도 불사하고, 그렇다!

일본이 내 강산을 범하지 않았던들,

처음에는 의병이었고, 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문턱까지

그리고 송관수는 만주벌에서 삶을 끝마감했고

권속을 끌고 서희 일행을 따라갔던 용의 풍상,

항일의 기운이 팽배해있던 간도 땅에서, 홍이는 감수성이 가장

첨예했던 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복은 아비와 그리고 애국지사를 악마같이 엮어간 형 거복의 

죄업을 보속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형의 지위까지 암암리에 이용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하고 자금을 운반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인도하기도 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 값도 안 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 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 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 

정면돌파를 했든 측면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고관대작을 지냈던 자, 지주들, 친일파, 그들 자손들이 

동경 유학길을 떠날 때 산간벽촌에서 그들은 외롭게 싸웠으며

일본의 치졸한 문화를 묻혀와서 이 강산에 뿌릴 때

왈 신식이라 했던가?

이 무렵 강쇠는 때 묻은 바지저고리 입고 광주리 엮어서 등에 메고

활동사진관 앞을 지나다가, 왜놈한테 봉변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 가난한 독립투자인 아비는 술병 하나 달랑 들고서

첩첩산중, 눈 쌓인 지리산 골짜기를 지나면서 목이 터져라!

<한오백년>그것도 두 구절밖에 모르는 가락을 되풀이하여

부르다가, 졸지에 잃은 딸아이 생각을 하다가, 

죽은지 오래된 김환을 소리쳐 부르며 욕설을 퍼붓다가

눈길에 무릎을 묻고 울다가, 그러던 강쇠는 해도사 산막에 당도하자

술병 놓고 절 한 번 하고 휘에게 학문을 가르쳐줄 것을 우격다짐으로 부탁했던 것이다. 

수천 년 경험의 축적인 내 역사를, 수천 년 풍토에 맞게 걸러내고,

또 걸러내어

이룩한 내 문화를 부정하고 능멸하며 내 땅에서 천년을 자란 거목을 쳐뉘며

서구의 씨앗 하나 얻어다가 심을 때, 어디 내 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논박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뭐 까짓 것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거리, 개의할 것 없어요"

하며 그들의 사상을 계몽주의라 했었지. 

송관수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진보적 식자라는 그들도 믿지 않았다. 형평사운동으로 알게 된 그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론의 수식가가 태반이었으며

학식은 처세요. 의복같은 것, 일본서 한창 유행인 풍조를 옮겨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실정이었다. 결국 그들이 지니고 온 지식의 정체는

내 것을 부수고, 흔적을 없게 하려는 것,

소위 개조론이며 조선의 계몽주의였다. 

부지불식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동경유학생과 기독교와 일본의 계몽주의 삼박자는

잘 맞은 셈이었다. 

일본은 숨어서 어떤 미소를 머금었을까?

주권과 강토는 이미 그들 수중에 있는 것, 내용이 문제 아니었을까.

창조의 활력인 사고와 관념과 사상, 즉 혼의 산물인 유형 무형의 것들을

부수어내고 공동을 만들기만 한다면 일본은 손 안 쓰고 코 푸는 격,

그 텅텅 비어버린 곳에다가 괴상한 현인신이며 만세일계를 집어넣고

꾹꾹 눌러 다져놓는다면 조선족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 모, 최모, 그들 추종자들이 계몽주의 기치를 높이 쳐들고

눈가림의 두루마기 점잖게 입고 우국지사로 거룩할 때

북만주 설원에서는 모포 한 장에 의지하고 잠들었을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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