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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작가 Sep 23. 2022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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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30대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나는 하루에 4시간 자며, 오전 9시 30분에 여의도 사무실에서 

작가언니와 함께 사무실을 청소하고, 

토스트를 사먹고, 

자리에 앉아 새벽 4시까지 ebs맞수의 촬영테입들을 

매주 100개씩 프리뷰노트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막내작가일이 이렇게 힘든가 했다. 

첫 날 프리뷰를 하루에 테입 1개를 겨우 보았던

언니와 나는, 나중에는 프리뷰의 신이 되어

하루에 10개씩 촬영테입을 찍었다. 

보는 속도도 빨라지고, 카메라의 움직임, 현장음, 

당시 방송원고를 쓰던 다섯 명의 메인작가님들의 

원고 스타일도 방송만 들어도, 누구 작가님이다라고

알아맞히기 시작했다. 

처음 스크롤에 보조작가로 나와 작가언니들의 이름이 올라갔을 때,

우리는, 눈을 떼지 못하고 보았다. 

20년지기 대작가 선배님들은, 만나면 우리에게 엄청 친절했는데

나는 선배님들이 사준 커다란 맥주를 지금도 기억한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맥주였는데, 너무 맛있었던 그런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선배님들이 아이템을 뭘 했으면 좋겠냐고 회식자리에서 

물어봐서, 나는 노숙자 다큐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할 때, 

선배님이 의아해했는데, 몇 년 뒤, 서울역 노숙자 다큐가 방송으로 나오더라. 

나는 이때, 같이 일을 시작한 작가언니와, 

그 이후에 마음 여린 내가 작가일을 하면서 힘들어할 때마다,

자신이 쓴 원고도 직접 나에게만 보내주고, 

작가로서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던, 대작가님을 만나

많은 걸 배웠다. 

작가님은, 나에게 나무 같은 따뜻한 존재였는데, 

내가 힘든 일을 겪을 땐 함께 화내주고, 내가 방송을 쉬기 시작했을 때

정말 힘든 일을 버티고 있을 때는, 전화를 하셔서 

"네 목소리를 내라. 네가 이긴다"며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주셨었다. 

그리고 "그동안 잘해왔잖아"라며 나를 인정해주시고, 

내가 정말 인생사 때문에 지쳤을 때는

"즐거운 일을 해라"며 나를 응원해주셨다. 


매일 그렇게 빡세게 일을 하다가, 아주 건강했던 나는

처음으로 맹장수술을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잡지사 기자시험을 봐서 한 달 동안의 기간을 거쳐 최종 1인으로 합격했다. 

방송작가보다 월급이 두 배였고, 늦으면 택시비도 나왔고, 

밤샘근무도 많지 않은 것 같았으나,

'작가'를 하고 싶은 내 마음은 변치 않았다. 


나는 다시 방송일을 시작했다. 

드라마 인 드라마였다. 그곳에서 만난 메인작가언니는, 지금도 간간히 연락을 한다. 

내가 배종옥선생님을 섭외할 때, 언니는 그 분은 자신이 직접 섭외해주겠다며

전화 한 큐에 섭외를 끝냈고,

연예인들 인터뷰를 갈 때는, 언니들이 연예인들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고 

내가 더빙 현장만 가도 언니들은, 칭찬을 해주면서 

막내작가라고 많이 예뻐해줬었다.  

내가 연예인들 섭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본을 알려준 언니다. 

그리고, ebs맞수에서 작가님께서 전화가 와서, 허브넷으로 일을 하러 갈 때,

언니는, 가슴이 아팠겠지만, 내 미래를 위해 나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안 하고,

따뜻한 말로 보내주었었다. 

나는 그 메인작가님을 보면서, 아, 내가 작가가 된다면, 

이렇게 가슴 따뜻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연예가 중계 프로그램을 하면서 프로그램을 3개씩 맡고,

지금은 동화작가로 당선, 출간작가가 된 언니는,

내가 드라마를 쓰는 걸 알고, 직접 전화를 해서 용기를 주고, 따뜻한 위로를 주는

그런 작가님이었다. 

또, 내가 힘들어할 때, 심리적으로 어떤 부분이 힘든지를 캐치하고,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언니였다. 


그 다음에는 나를 며느리 삼고 싶다고,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시겠다며,

막내작가인 나와 조연출을 좋은 차를 태워서, 녹화장까지 데려다주는

좋은 피디 사장님도 만났다. 

K본부에서 유명 프로그램을 만드셨던 그 분은,

당시 몇 십억을 받고, 프로덕션 사장이 되셨었는데, 

자신이 키우고 싶은 작가, 피디들을 

직접 불러서, 프로덕션 안에서 가르쳐주며 키우고자 노력했었다. 

당시 해외에서 살던 언니도 메신저로 연락을 받고 한국에 와서 

이 일을 시작했고, 

한 피디도, 이곳 프로덕션으로 와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일이 힘들어서 나는 그곳 사람들이 좋은 걸 잘 못 느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참 따뜻하고 좋은 인연이었다. 


나는 프리뷰, 섭외, 취재, 원고 쓰는 법, 기타 등등

예능, 교양, 뉴스, 다큐멘터리, 생방송 등에 맞춰서

원고를 쓰고 현장을 나가고, 일을 배우며, 방송일을 오랜 시간 해왔다. 

참 고마운 건, 내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인데도,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나를 많이 챙겨주고 도와주면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후, 나는 계속 일하던 언니나 피디들을 통해, 

연결 연결로 같이 일을 해왔다.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력서를 내는 일은 없었다. 

입봉을 하고, 프로그램을 시작한 후로는

언니들로부터 작가를 구하는 전화가 꽤 많이 왔는데 

일을 좀 하기 시작하는 작가들은, 여기 저기에서 많이 구하는 바람에 

언니들은 작가 구하기가 정말 힘들다고 말을 했었다. 


그러나, 구성작가일이 워낙 밤샘근무가 많고

스트레스가 많다 보니,

다른 쪽으로 이직하는 작가들도 있었고,

프로덕션 대표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대학교 국문과 선후배들도 함께 일을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언니들과 드림팀이 형성되기도 했다. 

위 아래 10년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정도로 대인관계가 좋았던

선배 덕분에, 우리팀은 화기애애하게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 그 선배는, 한참 작가 피디들이 중국으로 넘어갈 때 

중국으로 넘어가 중국에서 프로덕션 대표로 일을 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배우 김수현이 와도 카메라가 안 따라간다고 

3년 내내 투덜대던 선배님은, 

이제 그곳에서 중국 여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잘 살려고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막내작가 때부터 나는 드라마작가공부도 병행해온 터라

드라마를 현장에서 쓰는 언니들하고도 연락을 했는데,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얘기를 듣고는 한다. 

피디, 작가들과도 친분이 쌓였다. 


그러나, 방송일을 하면서부터는 

공과 사를 구분하기 시작해서, 

정말 일만 하느냐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어울리거나,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20대, 30대 때는 연애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사람들과 맥주나 술도 마시고, 

여행도 가고, 새로운 취미 활동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기 저기 많이 다녔어야 하는 건데, 

마음의 문을 닫고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지내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만 지키려고 하고, 

방송일만 열심히 하고 살아온 인생이 후회가 되기도 한다. 

마음의 문만 열었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좋은 추억 하나 못 쌓고, 일만 하고 살았던 시간들이 

참 후회가 된다. 


그땐,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나는 그렇게 답답하게 살았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방송작가로 대본을 쓰고 싶은 욕심을 더 크게 키워주고,

긍정적인 말로 나를 이끌어준 남미경작가님, 강보경작가님, 남미영작가님.


방송, 드라마공부를 통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나를 알아봐주고 방송작가로 이끌어주려고 한

한반도의 공룡을 쓰신 이용규 작가님,

내가 드라마작가의 꿈을 이룰 수 있게 이끌어주시려고 하는

야망의 전설 김영진 선생님(이응진교수님)

내가 정말 꿈꿔왔던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주려고 

'나'라는 사람을 보아주고, 내가 가진 문제들을 진단해주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강피디님.


이 세 사람은 나에게 부모님, 조영복교수님 다음으로 

내 마음, 인생을 바꿔준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마흔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도둑 맞은 것만 같다. 

이제 조금씩 내 인생을 살아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보는 것 같다. 


진실로 행복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 많은 고민을 한다. 


내가 갖은 일적인 꿈과 개인적 꿈 사이에서

이 균형을 어떻게 잘 맞춰야 하나,

나는 참 고민을 한다. 


나는 부족한 게 많다. 

그래서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키울 수 있는 

방송작가일을 나는 참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 일을 하면서는 참 많이 부족했던 내가,

그런 부족한 점들 대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들로,

나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살면서 사람은 글만 써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하고,

요리나 살림도 잘해야 하고, 

운동이나 여행, 개인 취미생활도 있어야 한다.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 부모 세대 때는, 먹고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일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살아왔다면, 

요즘 30,40대는 개인의 행복에 초점을 

더 맞추고 산다. 

나 역시 그렇다. 

일에 너무 치이다 보니, 개인활동, 가족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결혼을 할 사람은 결혼을 한 대로,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더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일과 육아가 바빠도,

서로 간에 대화가 서로를 위해준다면,

진실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대화만 할 수 있어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본다. 


20대, 30대 때는 일에 초점을 맞춰 살아왔지만,

이제 나는, 내가 잘한 부분과 실패한 부분을 본다. 

그리고, 잘한 이유와 실패한 이유를 분석한다. 

원인과 결과를 찾는다. 

마음을 들여다 보면, 정답이 나온다. 


부모님의 장단점, 결핍과 

나의 장단점, 결핍을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장단점, 결핍을 본다.


전에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전에는 깨달았다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 앞으로 나아갔는데,

내가 알면서도, 잘하지 못했던 것들도 있었다.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있었고, 이제는 더 많은 걸 알게 됐고,

더 많은 걸 본다. 


나라는 사람은 정말 단순한 사람이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인데, 

많이 알수록, 피곤해지고 힘들어지는 것들도 있다. 

그래도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알아야 한다. 


더 성숙해지고, 성장해야 한다. 


전보다, 더 후퇴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면으로는 더 단단해지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드러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 믿음이 또 내 뒷통수를 치더라도.

삶은 원래 그런 거 아니겠냐고. 

뒷통수를 여러 번 맞으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고 

꿈을 꾸고, 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희망을 부여잡고 가는 게 사람 아니고, 

인생 아니겠냐고.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중,

희망을 붙잡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내가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부터 아픈 사람, 유명인들의 아픔, 결핍을 알아보고, 

그 아픔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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