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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시인 Oct 15. 2024

서핑이란 일상 속 숨어있는 문학

누워도 다시 일어난다. 그래야 될 수밖에(feat. 김수영  '풀')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목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2022년 8월 무더운 어느 여름날, 설레는 마음으로 첫 서핑 강습을 받으러 부산 송정해수욕장에 갔다. 그 당시 내 나이 만 38세. 아이 둘에 살짝 배 나온 아저씨. 혼자 서핑 가는 게 두려워서 친구 한 놈 붙잡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같이 서핑 강습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 왜 친구한테 사정하면서까지 서핑을 배우러 갔냐고? 당연히 서핑이 하고 싶었으며, 서핑을 혼자 동경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서핑을 배우고 싶게 된 계기는 뭘까? 한 편의 영화 때문이다.     


“폭풍 속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페트릭 스웨이지’의 멋진 외모와, 캘리포니아의 멋진 해변과, 멋진 서핑 장면. 마지막에 죽을 줄 알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빅 웨이브(big wave)를 타러 돌진하는 모습까지. 명장면이 아닌 게 없다. 이 영화는 1991년 영화지만, 나는 그 영화를 2003년, 대학생 때 봤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서핑이란 환상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당시 서핑하는 사람을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물론 내가 사는 게 바빠 열심히 안 찾아다닌 것도 있지만, 남들 사는 대로 졸업하고 취업 준비하고 취업하고 29살에 결혼하고 30살에 첫째를 놓았다. 아주 바쁜 20대였다.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보고자 모범적인 생애를 지냈다. 그러다 부산 송정해수욕장을 드라이브하면서 지나가는데 서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와, 우리나라에도 서핑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는 한 달 뒤 수영장을 갔다. 사실 30살까지도 수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히 수영부터 배워야 서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년 동안 진짜 열심히 수영했다. 그러다가 2016년 둘째가 나왔다. 수영도 끊었고, 아이를 키우며 지냈다.  

   

2018년경부터인가 송정해수욕장은 서핑의 메카가 되었다. 다시 송정해수욕장을 드라이브하며 지나가는데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수백명은 되어 보였고, 서핑샵도 부지기수로 보였다.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몇 년을 더 보낸 뒤 올해는 꼭 서핑을 하리라 다짐했는데, 그 때가 바로 2022년 8월이다. 도저히 혼자 서핑 강습 받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친구를 설득하여 같이 강습을 받기로 하고 송정해수욕장 서핑샵을 방문했다. 원웨이브 원서퍼(one wave, one surfer), 보드의 명칭 등을 배우고 바다로 나갔다. 파도가 무릎높이 정도였고, 혼자서 파도를 잡을 수 없기에 강사가 서핑보드를 밀어주었다. 


“푸쉬(push), 업(up)!” - "푸쉬"라는 소리가 들리면 보드 위에 누워 있는 상태에서 팔을 밀며 상체를 활처럼 들어야 하고, “업”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뒷발을 당기는 “테이크오프(take off)”라는 동작을 해서 서핑보드 위에 일어서야 한다.(강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차츰차츰 풀어보겠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푸쉬업과 테이크오프 두 동작입니다) -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한 번에 일어났다. 주변에서 “오~~”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운동신경이 없지만 있는 척하며 당당히 다시 강사 옆으로 왔다. 근데 8명 중에서 4명은 한 번에 일어났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그 뒤 빠졌다가, 일어섰다가, 무한 반복. 마지막으로 혼자서 파도 잡는 법을 알려주며 강사는 떠났다. 2시간을 더 바다에 있었지만, 한 번도 파도를 잡은 적이 없었고, 계속 물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바다에서 나오니 나와 친구는 기진맥진.     


나는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를 보며 이날을 떠올렸다. 정확하진 않지만 ‘풀’은 민중을 뜻하며 ‘바람’은 억압을 뜻한다며, 힘든 세상에서도 민중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암울한 시대(1960년대)지만 희망을 내포한 시라고 배웠는데, 나에게 ‘풀’은 그날 수도 없이 빠졌던 ‘나 자신’이다. 강사가 떠난 뒤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 파도 위에서, 서핑보드 위에서 일어설 수 없었고, 풍덩풍덩 바닷속에 빠졌다. 풀처럼 힘들어도 계속 일어나야 했다. 바다에 빠져 죽을 순 없지 않은가. 풀처럼 빨리 빠져 누웠고, 빨리 일어났고, 바닷물 먹고 눈물·콧물 다 흘렸다. 아, 힘든 서핑이여. 나는 오늘 졌지만, 진 게 아니다. 바다에서 나와 터덜터덜 다시 서핑샵으로 걸어가면서도 바다를 다시 흘긋 보며 결코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무더운 여름날이 갑자기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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