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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Nov 03. 2022

할로윈의 슬픔

산골 일기 오십세 번째

나라가 큰 슬픔에 빠졌다. 

할로윈 축제의 비극으로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슨 정치적 이유나 상황논리를 다 떠나서 예기치 않게 생이별해야 하는 가족의 눈물과 고통과 아픔을 그 누가 그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찢긴 마음을 생각해 보라. 그들의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먼저 가슴에 미여지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라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인간인 것은, 감히 인간이라는 존엄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깊은 연민으로 보듬을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자연 생태계 가운데 인간이 스스로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약육강식이 아닌 양심에 근거한 생각과 행동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희생자들의 가족을 부둥켜안고 다만 함께 울어주고 싶다. 아무 말 없이 그냥 한없이 울어주고 싶다.          


하지만 팽목항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그 참사의 현장을 방문한 고위 공직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읽었던 어느 신문기사가 생각난다. 그 기사의 제목은 ‘그들은 왜 울지 않는가?’였다. 예기치 않은 비극 앞에 그들은 책임소재의 불똥이 어디로 튈 것인지, 수습방안만을 고민하였지 슬픔에 겨운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할로윈 참사에도 여전히 같은 제목의 기사와 이야기들이 떠돈다. 벌써부터 정치적인 책임공방 가운데 어떻게 우위를 점하거나 회피할 수 있을지 변명과 핑곗거리를 찾는데 혈안인 모습이다. 왜 높은 자리에만 오르면 한결같이 인간적인 도리조차 상실한 냉혈한 양심의 인간이 되고 마는 걸까?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는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한 나라의 재능이 한 곳으로만 집중되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라고 간파한 바 있다. 인간 됨됨이나 성품보다 소위 국, 영, 수 잘해서 선택되고, 치열한 경쟁을 이기며 그 자리까지 올랐으니 무슨 피, 눈물이 남아있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견 맞는 이야기다. 어떻게 올라간 자리인데! 그 자리를 위태롭게 하는 그 어떤 것들도 용납할 수 없을 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일이 부득이한 문제이며 수습해야 할 일거리이며 책임을 벗어던져야 할 명분이나 이유를 찾아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 문제 앞에 상처 입은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은 안중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위 망언이라 할 수 있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들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오고 마는 것이다.      


혹자는 이 모든 문제가 성적 중심, 우열 중심의 교육시스템에 있다고 간파하기도 한다. 인간은 저마다 고유한 재능과 특성이 있는데 성적이라는 잣대 속으로 몰아넣고 소위 앞선 자들만 선택되는 구도이니 어떻게 사회병리학적 스트레스가 만연하지 않겠는가!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한 부모에게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제 방에 들어가 한참을 통곡하며 울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라 어렵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그만 가슴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내게 혈액형이 뭐냐고 물어서 B형이라 그랬는데 아이들이 바보도 사람의 혈액형을 가지고 있네라고 놀려서 너무 마음이 아파. 엄마 나는 사람이 아닌 거야? “   

  

아이가 통곡하며 들려준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소위 그 반에서 똑똑하다는 아이들, 공부 잘한다는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짐승 같은 말로 상처받은 아이가 너무나 안쓰러워 가슴이 미여졌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오로지 성적으로 윗자리에 올라 그 비정한 가슴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군림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정녕 따뜻한 가슴과 비록 그 자리를 잃을지언정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리더의 위치에 설 수 없는 것인가! 마음이 씁쓸했다. 


학교 교과목 가운데 예전에는 도덕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 됨됨이의 기본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인터넷만 뒤져도 세상의 거의 모든 지식을 다 얻을 수 있는 요즘 세상에. 아마도 교육은 다시 인간 품성을 배우고 익히는 과거의 교육 시스템으로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려서라도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지도편달을 요구했던 때로 말이다. 편달(鞭撻)이라는 의미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매를 든다’라는 의미이니 옛 교육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거리를 뒤덮고 있던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극하는 정치적 선동 문구로 가득한 플래카드들이 내려지고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현수막으로 바뀐 점이다. 속내야 어떤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선 고인을 생각하고 가족의 슬픔을 생각하는 마음이 대세인 것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진즉에 우선순위가 그랬어야 한다. 결국 모든 정책이나 대안에 앞서 사람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 책임소재니 개선대책이니 하는 것들이 따져지고 마련되어야 한다.     


점점 더 양극화가 심화되며 상대방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높아가는 현실이 정말 우려스럽기만 하다. 인간적 존엄성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길 없는 증오와 비난과 질책만이 난무하는 정치 사회적 현실이 개탄스럽다. 


보편적인 양심에 기초한 정의로움,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따스한 가슴, 

어진 말투가 사회 곳곳에서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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