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솔 Nov 02. 2022

내가 정답이 아냐!

산골 일기 오십 두 번째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언제나 한결같은 우정과 존경을 함께 나눌 친구나 이웃을 만나는 일은 복된 일이다. 처음에는 좋은 인연으로 만났지만 세월이 가면서 서운하고 섭섭한 관계로 변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런 단절과 결별은 평소 믿음과 신뢰가 깊었던 관계일수록 더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긴다. 그래서 사람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늘 조심스럽다. 혹여 상처받는 일이 있을까 싶어 새로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저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과 스쳐 보낼 사람들을 구분하는 나름의 잣대를 갖는다. 때로는 그 잣대가 취미 코드일 수도 있고, 생각의 방향일 수도 있고, 자기 성향과 맞는 성품일 수도 있다.    

  

사람을 구별 짓는 것을 싫어하지만 시골 살이를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사람을 구분하는 잣대 하나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다. 집을 짓고 작은 뜨락을 가꾸면서 만난 수많은 이웃들과 선생들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분명한 차이를 알게 된 것이다. 함께할만한 사람의 말과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의 말은 확연하게 달랐다.     


“많이 만나보고, 경험해 보세요. 절대 내게 배운 것이나 들은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은 넓고 배울 사람들은 많답니다.”     


좋은 선생이나 이웃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알려주고 나서는 꼭 자신의 말만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자신의 경험이나 조언이 전부가 아니니 또 다른 재야의 고수들을 찾아보라 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사람들의 말은 오직 자신에게만 듣고 배우라고 강요했다. ’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던데...‘라고 작은 반론이라도 전개할라치면 냉소 섞인 무시나 무안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다른데 기웃거릴 필요 없어요. 내가 전문 간데! 다른 말 들어봐야 다 쓸데없어요.”


그들은 항상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자기와 다른 생각이나 방향을 폄하하거나 비난하기 일쑤였다. 소위 장인이니, 명장이니 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권위주의적이었다. 심지어 그중 어떤 사람은 “대학교수 백 명을 데려놔 바라. 나를 이길 수 있나!”라고 말하며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직장에서 입사 3년 차가 제일 시끄럽다는 말이 생각난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벌이는 안단이 박사들이 거개 3년 경력의 초짜들이라는 것이다. “한 3년 지나고 나니 뭐 다 알겠더라고” 그런데 그런 친구들이 같은 분야에서 10년쯤 보내고 나면 입버릇처럼 “아는 게 없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정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제 조금 알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본다. 안다는 것은 모르는 영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이니 배우면 배울수록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므로 고개 숙이지 못하는 앎은 아무리 오랜 경력을 가졌어도 초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같은 우물에 수십 년을 갇혀 지낸 개구리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일천한 앎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람은 아무리 풍부한 식견을 가졌다 할지라도 어쩌면 진짜 초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평등한 인간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이끌려한다는 점이다. 대개 자기에게만 들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심리적, 관계적 우위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부류들이다. 소위 대장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머리 위로 한 뼘이라도 더 솟아올라야 마음이 편한 사람들이다. 무조건 피해야 할 인간군상이다. 그 누구라도 대등한 관계가 아닌 종속적인 관계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 피해야 할 사람이다. 인간은 그 누구나 다른 사람에 의해 폄훼당할 수 없는 스스로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속적인 관계가 무서운 것은 한번 그 관계가 정립되고 나면 그 억압이나 심리적 열위의 관계가 쉽게 청산되기 어려운데 있다. 간혹 주변에서 한번 종속적인 관계를 허용하고 나서 점차 보편적인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추종자로 변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는 확증편향적 논리가 깊어져 나중에는 심리적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 지경에 이르면 옳고 그름의 판단은 이미 사라지고 그의 작은 칭찬마저 은덕으로 알아 스스로 심리적 종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당신을 지배하거나 다스리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인간관계는 절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호혜적 관계여야 한다. 그 누구라도 당신 위에 군림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 위치와 지식과 권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는 요소가 되는 것은 절대 불합리한 일이다.       


반면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진 좋은 관계일수록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소중히 대해야 한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소중한 사람들을 허드레 그릇 대하듯 해서는 안 된다. 작은 차이로 우위에 서려하거나 소홀히 대해서도 안 된다. 늘 함께 하기 때문에 더욱 깨어지기 쉬운 그릇처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코카콜라사의 전 CEO 더글라스 데프트는 이에 대해 매우 깊은 통찰력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 인생이란 일, 가족, 건강, 친구, 자기 자신이라는 다섯 개의 공을 저글링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모든 공이 유리 공이지만, 오직 일만은 고무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관계가 일로 맺어진 관계지만 그 가운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둘러싼 ’ 가족, 건강, 친구,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일은 마치 고무공과 같아서 항상 자신에게 되돌아오지만 소홀히 대한 ’ 가족, 건강, 친구, 자기 자신‘은 그만 깨어져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관계인 가족과 친구는 마음을 다하여 세심히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귀하고 약한 보석 같은 존재다.      


흔한 농담으로 결혼한 사람을 ’ 잡아놓은 물고기‘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결혼 전에는 그렇게 정성을 다하더니 왜 결혼 후에는 서운하게 대하냐고 물으면 ’ 잡아놓은 물고기에 밥 주는 거 보았냐? “라는 농담을 한다.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참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존재인데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막 대해도 된다는 생각은 사랑이나 우정조차 소유로 생각하는 못난 착각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나 지배가 아니라 서로의 존엄함을 기억하는 형평의 관계여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가장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고 만다.      


그런 실수들을 오랜 세월 반복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입이 무거워진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꼰대적 말투가 나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섣불리 뱉었던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아는 척했던 말들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더 말을 아끼게 된다. 무언가를 알아가고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아는 것이 없다는 진실의 벽에 부딪힌다. 필연적으로 수박 겉핥기로 배운 얄팍한 지식을 떠벌였던 시간들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작가의 이전글 장작을 쌓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