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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Feb 09. 2024

인생을 담은 그림

산골일기 육십 번째

미술을 배우기로 했다. 


중‧고등학교 미술시간 이후 손을 놓았던 데생부터 시작한다. 

공유 스튜디오 ’엄쌀롱‘에 막내로 들어가 화려한 유화 붓질 선배들 틈에서 

연필 한 자루를 쥐고 꼼지락 거리길 어느덧 한 달. 

나를 둘러싼 사물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벽돌 한 장에 맺혀 있는 거칠고 딱딱한 질감의 생동감, 각 면을 따라 흐르는 빛의 미세한 농담차이, 

주전자 하나에 담겨있는 쩌렁한 빛의 눈부심과 어둡게 가라앉은 그림자들, 

배추 한 포기에 담겨있는 유려하고도 섬세한 섬유질의 부드러운 굴국들... 

내 망막에 맺힌 피사체 하나하나가 모두 경이롭고 신비하다. 

미술을 배우기 전에는 몰랐는데 사물 하나하나, 하찮게 생각했던 미물 하나까지 

모두 고유의 가치로 빛나며 자기만의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동안 뭘 하고 산 거지? 

이렇게 경이로운 사물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면서도 어찌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 수 있었는지!     


공유화실 ’ 엄살롱‘의 선생님은 달동네 그림으로 유명한 엄경근 화백이다. 

그는 수익 안 되는 살롱을 운영하며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흘려보내는 삶을 살고 있다. 참 멋진 사람이다. 재능을 공유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그의 그림은 그의 인품만큼이나 멋진 서사가 담겨 있어서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의 삶의 서사가 담긴 그림에는 자주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림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언제나 슈퍼맨의 망토를 걸치고 있다. 

그의 망토 속에는 어릴 적 태산 같았던 아버지의 커다란 어깨와 함께 

가족에게 들키지 말아야 했던 아버지의 초라함이 동시에 베여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버지 망토는 세상 그 어떤 망토보다 슬픈 느낌이 묻어난다. 

자식들 앞에서는 위엄을 부려도 돌아서면 생활의 무게에 짓눌리고 마는 

한없이 나약한 어깨의 여느 아버지들의 뒷모습을 닮은 슈퍼맨.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인간을 향한 원초적인 연민과 그리움 가득한 정서가 묻어난다. 

그림 하나가 사물의 내밀한 윤곽은 물론 관계에 얽힌 정서까지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깊은 감동을 불러낸다.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표현하는 데생에 머물고 있지만 

나는 언제쯤 그 사물과 관계의 내밀함을 그려낼 수 있을까? 

언제쯤 사물의 속살을 나만의 언어로 불러내고 풀어낼 수 있을까? 

그때가 언제일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무심코 지났던 사물들이 내뿜는 그 고유의 아름다움과 광휘에 잠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 광휘 속에서 밝음과 어둠의 선명함과 경계를 그려내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 

사는 일이 무료하다면 그림을 시작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들여다볼수록 숨겨진 아름다운을 보여주는 경이로운 세상을 마주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찰나를 누리며 붙잡아 보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까! 

내 앞에 마주한 주전자에 부딪혀 쩡 하고 튕겨 나가는 빛을 작은 종이 위에 포박하는 일. 

그래서 더 이상 튕겨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는 이 기적의 기쁨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미술을 시작하면서 꽤나 많이 행복해졌다. 일상의 행‧불행을 뛰어넘을 만큼. 

며칠 전 기대했던 사업제안이 탈락했다는 비관적 소식에 상실감을 털어낼 수 없었는데 

데생연필을 드는 순간 마음의 격랑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둘러싼 흥망성쇠의 파고가 이미 지나간 과거의 페이지가 되는 신비한 경험.      


세상은 존재로 충만하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존재로 충만하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사물들과 대화하는 나의 말수도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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