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솔 Apr 15. 2024

하얀 동백

산골일기 육십칠 번째 

“여보 여보! 우리 집에 신기한 일이 생겼어요!”


뜨락에 나가있던 아내가 호들갑스럽게 나를 부른다. 

막 도착한 봄기운에 아마도 뜨락 어느 구석에 이름 모를 꽃이라도 피었음이 분명했다.


 “여보 이리 와 보세요!”


아내를 따라 나간 곳은 며칠 전부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동백이 고즈넉한 울타리 가였다. 

별다른 풍경이 아니라 의아해하는 참에 아내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꽃 좀 봐요”


아내가 가리킨 곳을 보니 

아! 세상에나 놀랍게도 붉은 꽃송이 사이로 

희고 순결한 동백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와 이게 무슨 일이고! 붉은 동백 사이에 흰 동백이라니!”


홀로 핀 흰 동백이 얼마나 신기하고 사랑스러운지 한참을 서서 동백을 보았다. 

다른 집 동백이 다 필 동안 겨우 꽃망울만 삐죽이 내밀던 녀석인데 

이런 신묘한 꽃을 피워 낼 줄이야! 

신기한 마음에 동백의 꽃말을 찾아보고는 아내랑 한참을 웃었다. 

붉은 동백의 꽃말은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였다. 

그런데 흰색 동백꽃은 ‘비밀한 사랑’이었다. 

빵 터질 수밖에! 

붉은 동백은 순애보를 닮은 느낌인데 흰 동백은 왠지 금지된 사랑 같은 느낌... 


하지만 생각을 바꿔본다. 

모두가 붉은 꽃망울을 터뜨릴 때 홀로 흰빛을 담았으니 얼마나 신비하고 비밀스러운가! 누구나 마음 한 구석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순수하고도 순결한 사랑의 비밀을 품고 있다면 그는 참으로 행운의 사람일터이다. 

가장 순수해야 할 사랑마저 오염되는 현실을 바라보며 

순백한 사랑의 비밀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을 어디서 보겠는가!      


자연은 언제나 그렇게 예기치 않는 감동의 선물을 불쑥 내미는 개구쟁이 같다. 

집 뜨락에는 며칠 상간에 해당화며 튤립이며 조팝나무며 명자나무며 

뜨락에 심긴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잎새를 밀어내고 있는 장미도 조만간 꽃망울을 터뜨릴 테다. 

앙상한 가지만 외로워 보이던 나무들이 그렇게 곱디고운 연둣빛 잎새를 내고 

겨우내 스케치한 그림을 선보일 때 그 신비로움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계절 중 4월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다. 

겨우내 비축된 양식이 다 떨어지고 

여름 열매들은 아직 영글지 않은 가장 배고픈 시절, 

그래서 잔인한 달이라 여겨졌던 보릿고개 4월이 이제 가장 멋진 날이 된 것이다. 


녹음이 짙어지기 전 이제 막 돋기 시작한 연두 빛 잎새들이 바람에 팔랑거리며 

눈부신 햇살을 투영해 낼 때 그 빛의 광휘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봄날 오후 4시쯤 빛살이 사선(斜線)으로 빗겨 떨어질 때, 

잎새가 막 돋기 시작한 어느 나무 그늘이라도 좋으니 

그 아래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시라. 

그리고 연두 빛 잎새를 뚫고 내리는 그 빛의 부드러운 시선과 눈을 맞춰 보시라. 

분명 마음의 모든 그늘이 밝아져 오는 빛의 향연을 누리게 되시리라. 


앙상했던 가지마다 연두 빛으로 물드는 신비한 계절, 

4월의 한 복판을 뚫고 피어난 우리 집 하얀 동백. 

뛰는 가슴을 잠시 진정시키고 뜨락 구석구석을 더듬어 본다. 

요 발칙한 봄날의 요정이 또 어느 빈자리에 기가 막힌 장난 끼 하나를 

숨겨 놨는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신비스러운 흰 동백을 보았으니 길조 아닌가!

어디 복권이라도 한 장 사볼까?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에이 속물 같으니라고!     


4월의 봄 뜨락은 언제 보아도 빙긋 웃는 얼굴이다.

그래서 참 좋다.      


작가의 이전글 봄바람과 대나무 숲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