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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pr 17. 2024

이발소 그림

산골일기 육십여덟번째

 어떤 말들은 마음에 꽂혀서 오래도록 남는다. 

그렇다고 마음에 꽂힌 말들이 모두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말들은 생각날 때마다 힘이 되기도 하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게도 한다. 

최근 들은 한마디 말이 그렇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느라 오래도록 고민하게 된 말을 들었다.   

   

“자칫하면 이발소 그림이 될 수 있어요”     


미술을 가르치는 엄화백이 내 그림을 보면서 던진 한마디 말이 일주일이 지나도록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은데 딱 부러지게 무슨 뜻인지 정의가 안 되었다. 

이발소 그림과 예술적 가치를 담은 그림 사이의 극명한 차이는 무엇일까? 

고민 아닌 고민이 머릿속을 헤집고 떠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리저리 칠해놓은 내 그림에서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어렴풋하게, 아니 때로는 극명하게 이발소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였다.  

    

오랜 이발소마다 걸려 있던 풍경화 한두 점. 

어떤 이발소에는 밀레의 만종과 같은 세기의 명화가 걸려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한 번쯤 가서 쉬고 싶은 숲과 계곡 그림이었다. 

머리를 깎으면서 무심결에 눈길이 가거나 거둬지면 그만인 그림들이다.

 그 그림들에서 풍겨 나는 이발소 냄새? 이발소 촉감?     


그림을 처음 배우다 보니 사물을 보이는 대로 흉내 내고 묘사하기에 급급하다. 

보이는 풍경이나 사진을 있는 그대로 따라 그리다 보니 형식미나 색감의 깊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형태를 있는 그대로 옮겨내기도 버겁다. 

그 속내를 들킨 듯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한 말이 “자칫하면 이발소 그림이 될 수 있어요”라는 말이었다. 

그럴듯하게 닮아 보이도록 묘사하고 덧칠한 얄팍하고 단순한 형태들, 

그림에 일천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마구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양산품 같은 나의 그림들.    

   

앞으로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지? 그림을 처음 입문하고 ‘별거 아니네’ 싶었던 생각들이 부끄러워지면서 

갑자기 붓을 드는 것이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그러다 문득 마크 로스코의 삭면추상화를 접하면서 생각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다. 

내 눈에는 그냥 색깔 몇 개 칠해놓은 게 전부인 거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앞에서 압도되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여러 평론가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고급 표현들을 현란하게 구사하며 

작품의 감동을 전해주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런데 그가 1951년 만든 No6(Violet, Green and Red)이라는 작품이 

2014년 경매장에서 무려 1억 4천만 유로(한화로 1,925억 정도)에 팔렸다는 정보는

나를 더욱 기함하게 만들었다. 

내 눈엔 아무리 봐도 세 개의 색깔이 배치된 세 개의 사각형이 전부인데... 

이것은 분명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심미안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존재함에 틀림없는 것이다. 

개화되지 않은 내 눈으로는 눈치채거나 인식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혼란 앞에 문득 귀한 포도주를 선물 받고 허비한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귀하고 비싼 포도주를 선물 받았지만 맛을 전혀 몰랐던 친구에게 

그 포도주는 그저 떫고 맛없는 술에 불과했다. 

결국 그 친구는 달달한 막걸리에 그 포도주를 타마시고는 ‘이제야 먹을 만하네’ 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포도주 주인이 ‘개발에 편자지! 

아무에게나 포도주를 선물하는 일은 이제 다시없을 거야’라고 결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아마도 내게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막걸리에 타 마시고만 포도주 같은 것일 테다. 

하지만 깨갱하는 마음으로 변명하자면 분명하고 분명한 것은 

마크 로스코의 그 어떤 작품도 이발소에 걸릴 수는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작품의 가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수의 심미안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나와 같은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드나드는 곳에 걸릴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보면 특정한 소수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좋은 걸까? 

아니면 누구나 눈길 한번 주면 그만인 흔한 그림들이 좋은 걸까? 

무엇이 정답인지, 아니 정답이 있기는 한 걸까 싶지만 나는 지금 댓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처럼 혼란스럽다. 

이발소 냄새가 안 나는 그림. 그게 내게 가능하긴 한 걸까? 

내 어떤 그림에서도 이발소 냄새가 안 났으면 싶지만... 

아니 이발소 냄새가 나면 또 어떤가? 


아~ 모르겠다. 그래도 누군가 이발소 느낌이 난다고 말하면 무척이나 마음이 언짢을 것 같다. 

왜 이발소 냄새가 나느냐고 따져 물을 깜냥도 못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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