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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lee Jun 02. 2021

칸이 남긴 사람

4부


친한 친구랑 일하는 게 가능해? 그것도 4년이나.


우리의 관계를 익히 아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친한 친구와의 팀플은 피해라’는 조언이 무색하게 우리는 서로에게 든든한 동료이자 명랑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마치 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그 사이를 넘나 들었다. 물론 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덕분에 꿈도, 낭만도, 귀여운 시도도 끊임없던 지난 4년이었다.


친한 친구랑 어떻게 일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가 특별히 한 게 있을까 생각했어. 친한 걸 넘어선 사람이라 그런가.


근데 그걸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게 쉽지 않았어. 이제야 그러는 거 같아.


우린 동료가 먼저 됐지.


왜냐하면 시작이 TCU*였으니까. 광고제 준비하면서 서로를 점점 알아가는 느낌이었어. 근데 친구가 먼저 되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하잖아. 함께 일하며 친해져서 그런지 신뢰가 이미 쌓여있었어.
*학과 글로벌 탐방단으로 텍사스에 위치한 한 대학에 함께 다녀왔다.


친하지 않았을 때도 잘 맞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긴 했어. 같이 준비하면서 좋았던 건 자신 없는 아이디어도 그냥 말할 수 있는 신뢰감. 신뢰가 있으니까 작은 것도 그냥 말할 수 있지. 회의에서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건 중요하니까.


나도 구린 걸 말해야 돼서 그런 거 아닐까? ㅋㅋㅋ


아니야. 딴 팀플이었으면 말하지 않았을 거 같은 사소한 부분도 말했어. 아이디어 낼 때의 심리적 안정감이랄까. 인사이트라는 게 사실 별거 아닌 작은 부분이잖아. 그런 것도 고민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넘기는 사람이 있거든. 예를 들면, 냉장고는 항상 켜져 있는 유일한 가전제품이다. 이런 걸 보고 아이디어로 발전시켜 보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런 사소한 것도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좋았어.


맞아. 그런 얘기는 언니랑 할 수 있지. 계좌에 있는 100원짜리 잔돈으로 부담 없는 기부문화를 만들면 어떨까 얘기하기도 하고.


나는 작은 것에도 크게 반응하는 편인데 그걸 주변 사람에게 보내면 공감대 형성이 안 되는 일이 몇 번 있었어. 그래서 공유를 하는 게 주변 사람한테 짐이 되는 것 같다고 종종 생각했어. 근데 너는 그걸 잘 들어줬던 사람이었지. 2018년 일기장에 쓰여있더라고. ‘이렇게 속 얘기를 많이 한 사람이 처음이다.’ 최근 일로 보자면 어떻게 37분짜리 래퍼 인터뷰 영상을 공유했는데 다 볼 수 있냐는 거지. 같이 일하면서 어려웠던 건 굳이 생각하자면 언니라서 배려해줄까 봐?


그런 거 1도 없어서 지금 좀 그래. (웃음) 언니를 주헤더라고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러워진 시점부터는 친구 같았어. 든든한 친구.


근데 보통 언니들이 말하면 '좋아요!' 이렇게 말하게 되잖아. 내가 무슨 말 하면 다 좋다고 해서 진짜 좋은 게 맞나 몇 번 생각했어. 어려웠다기보단 신경 쓰였다?


좋은 걸 좋다 했겠지. 별로인 거 좋다고 못 하는 스타일이잖아. 근데 언니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 했을 수 있을 것 같아. 비슷한 맥락에서 나도 신경 쓰이는 건 있었어. 언니가 ‘최고’라는 말을 정말 자주 하잖아. ‘최고’가 너무 많으니까 동생이라서 봐주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언니가 ‘최고’라고 해도 안 믿게 되는 건 있었어 (웃음)


신뢰를 잃었네...


아니야. 성향이 다른 거지. 난 어렸을 때부터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최대한 정확히 표현하고 싶었어. 그래서 나한테 최상급은 진짜 그런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아껴뒀던 것 같아.


내가 저번에 너한테 '말에서 사람이 보인다'라고 했잖아. 예전부터 너는 말을 한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한다는 생각을 했어. 상투적인 걸 경계하고. 너 힘내라는 말 싫어하잖아. 최상급을 쉽게 못 붙인다고 말했던 것도 그래. 난 말을 많이 하고 보통 후회하지.


내가 말에 예민해서 그런가 봐 (웃음) 힘내라는 말보다 힘 나는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근데 요즘은 팀플 할 때 ‘최고’라고 자주 말해. 예전엔 내가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스스로 빈말하는 게 싫었어. 보지 못하면서 ‘곧 보자’, ‘한 번 봐야지.’라는 말보다 차라리 ‘잘 지내’라고 진심을 담아 말하고 싶고. 근데 일할 때, 그 말 한마디로 인해 상대의 기분이 좋아지고 시너지가 난다면 하는 편이 좋은 것 같아.


나는 오히려 반대로 하는데. 널 보고 말을 신중히 해야겠다 생각했어. 아는 단어도 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이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의식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다 새로워. 상투적으로 쓰는 말을 경계하는 건 너한테 받은 영향이야.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준 거네.


네가 저번에 메일로 ‘우리 기특해’라고 했잖아. ‘기특하다'는 말도 정말 좋았다? ‘기특하다’의 뜻도 진짜 맘에 들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신통하여 귀염성이 있다.’


그 말이 그나마 담을 수 있는 말이었어. 기특하다는 말이 보통 나이 든 사람이 어린아이한테 쓰는 말이잖아. 우리가 과거의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 같은 거 아닐까. 우리는 좋고 싫음이 뚜렷한 편인데 지금까지 우리가 싫어했던 것들을 자꾸 허물어왔던 것 같아. 돌이켜봤을 때 한 명이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같이 시도해보고 그랬잖아. 서로를 잘, 그리고 넓게 살도록 해주는 게 있었지.


맞네.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아. 우리는 옛날로 돌아갈수록 확신에 차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열려있는 사람이 됐지.


얼마 전에 2018년 일기장을 보는데 우리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라고. 그때도 우린 너무 확신에 차 있어. 그래서 대화가 소중했던 것 같아. 우리는 만나지 못할 때 다양한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걸 서로에게 전하잖아. 내가 빠더너스 영상을 보는 것도, 언니가 시를 읽어보게 되는 것도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공유하고 있는 게 많은 것도 우리의 시너지라고 생각해. 같은 레퍼런스로 공부하고 비슷한 속도로 성장해왔으니. 좋다고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예전부터 닮았다고 생각한 건 ‘배우는 태도'. 언니랑 무엇이든 보거나 듣고 나면 꼭 배우고 느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눴던 것 같아.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 나의 ‘좋다’의 기준은 ‘저 사람을 닮고 싶나’, ‘저걸 배우고 싶나’야. 분야를 막론하고 좋으면 배우고 싶어 하는데 너도 그랬지. 그런 사람이 내 옆에 있으니까 대화도 재밌고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은?


맞아. 우린 우리가 좋고 재미있어야 움직였어. 그럴 때 확 파고드는 게 있었지.


네가 내 블로그에 쓴 댓글이 있어. 네가 쓴 댓글이지만 너를 생각하는 내 생각이기도 했단 말이야. 그래서 느꼈지. 이런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불안한 마음에 원하지 않는 걸 하려고 하는 나를 여러 번 막아 세웠거든. 그런데 함께 있는 헤더도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아 한편으로 든든하고 그랬어. -  2020.12.30 혜원의 블로그 댓글 중에서


얼마 전 편지 내용이랑도 연결되는 것 같아.


네가 편지에 썼잖아. 대화가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고. 너무 공감했어. 너한테 좋은 영향 많이 받아서 닮아지려고 한 게 아닌가. 나는 닮고 싶으면 다 따라 하니까.


난 언니가 나랑 같이 호들갑 떨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았어. 무덤덤한 사람이 아니라서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았어. 내가 너~무 좋아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언니는 늘 옆에서 같이 뛰는 사람이었어. 내가 무엇을 느끼든 언니는 이해할 것 같았고.


우리 윽! 이모티콘 많이 쓰잖아. 너무 좋은 걸 표현할 수 있는 거. 같이 좋아할 수 있어서 공유를 많이 한 거지.


여행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티티새인데 네가 떠오른 문장이 있었어. 네가 205p에 밑줄 그은 문장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거랑 비슷해서 나도 느낌표를 찍어두고 싶었어. - 2021.2.28 편지 혜원이 소연에게

요즘 너한테 얼마나 편지를 많이 썼는지 모르겠다. 쓰고는 찢어버리고 그러고는 또 쓰고.. 왜 너일까? 하지만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너만이 내 말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무래도 진짜로 죽어가는 듯한 지금, 내 마음속의 희망이라고는 너한테 편지를 남기겠다는 것뿐이야. - 요시모토 바나나 <티티새> 205p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아무리 사소해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어. 작년 여름, 사당에서 언니가 학교 과제 발표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만 너무 진심이었어’라고 하는 거야. 그때 웃겼던 게 나도 미대 수업 들으면서 자주 했던 생각이었거든.


맞아 혼자 다르게 준비해 갔지. 다른 사람들은 작품만 설명만 하고 나오는데, 나만 내 이야기를 많이 넣었어. 나대로 잘한 거 같은데 그땐 혼자 다른 형식으로 발표 준비한 게 신경 쓰였어. 내가 너한테 별 얘기를 다 했구나.


예전에 과제로 구겐하임 같은 구조물을 만들고 발표한 적이 있어. 교수님이 당시에 각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담은 구조물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그때의 나는 많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열심히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스스로 성장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었어. 자취를 시작하면서 삶이 갑자기 변했고 시와는 뉴욕 나갈 준비 하느라 정신없을 때였지. 그래서 그때 나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사실 제자리걸음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표현하는 구조물을 만들고 싶었어. 어쩌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지.


천잰데? 그걸 구겐하임식으로 만들었다는 거잖아. 위에서 보면 제자리 돌고 있는 거고.


그 안에 걷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뱅글뱅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조금씩 위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 근데 이런 것도 당시의 나를 너무 많이 드러내는 부분이어서 기말 발표하는데 진짜 쑥스럽더라. 근데 1월에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는데 비슷한 문장이 나오는 거야.

우리는 쳇바퀴처럼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위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거야. 그 바퀴는 둥근 원이 아니라 나선형이고. 우리는 이미 많은 단계를 거쳐 온 거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중에서


헤세랑 똑같은 생각을 하다니!


내가 했던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했던 고민이구나 싶었어.


2019년에는 뉴욕, 도쿄, 토론토 등 각자의 위치가 달라졌고 자연스럽게 1년 동안 리모트 워크를 진행했다. 그리고 2019년 봄과 2020년 봄에는 새로운 팀원이 합류했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 협업이 필수적이라는 걸 배웠어. 떨어져서 일하는 게 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가능했던 이유는 서로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맞아. 난 모든 게 내 손을 다 거쳐야 마음이 편한 경향이 있었어. 근데 믿음을 전제로 각자의 일을 하니까 효율성도 올라가고 퀄리티도 올라갔지. 업무 위임의 중요성을 국제광고제 하면서 다시 한번 느꼈어.


서로가 약속한 시간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으니까 지구 끝과 끝에 있어도 가능할 것 같았어.


그리고 팀원이 늘면서 추진력이 좋아졌어. 아이디어에 한 번 더 확신을 주는 게 있었지. 원래 항상 우리 둘만 만났잖아. 새로운 시각을 차단하고 있지는 않나 걱정했거든.


맞아. 나는 다른 의견 제시해주는 것도 좋았고 다른 팀원이 우리 의견에 동의할 때는 그 아이디어에 힘이 실리는 느낌이었어.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



크고 작은 실패를 겪었고 그 안에서 어김없이 우리는 배우고 다시 일어섰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빛나는 모습만큼이나 작고 초라해진 모습도 알아 갔다. 어떤 이야기든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시시콜콜한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도, 말을 애써 고르지 않아도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는 저절로 밀도가 생겼다. 서로의 미래에 아낌없이 기대를 쏟아붓는 역할을 맡았고 자연스럽게 다음을 계획하는 사이가 되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몇 안 되는 웃음과 기억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우리에게 칸은, 정확히 칸을 준비했던 모든 시간은 분명 먼 미래에 꺼내 보아도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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