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낌표

제스퍼모리슨 전시

Jasper Morrison Thingless

by 로즈 리
piknic

드디어 종강을 했다. 한 학기동안 보람차고 행복한 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힘든 날도 많았던 것 같다. 너무 지치고 삶이 팍팍하다고 느껴질 때면 전시를 종종 보러 갔다. 5개월 전,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류이치 사가모토의 전시를 보러갔다가 회현역에 있는 piknic이라는 공간을 알게되었다. piknic은 1970년대 중견 제약회사의 사옥으로 지어진 후, 시간이 멈춰진 채 40년이 지난 서울 도심의 구식 건물을 일부 개조하여 만든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이다. 피크닉은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모더니즘의 계승자이자 '슈퍼노멀' 철학으로 반향을 일으킨 영국 디자이너 제스퍼모리슨의 세계를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를 개최했다. 1986년 27세의 나이에 스튜디오를 설립한 이래 비트라, 무인양품, 삼성 등 다양한 기업과 함께하며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재스퍼 모리슨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디자이너로 꼽힌다.



언어가 없는 세상


A world without words

제스퍼모리슨은 평소에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얻자 밀라노 디자인 대학에서 강연을 요청했고 어쩔 수 없이 강연을 시작한 제스퍼모리슨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위의 이미지 영상을 틀어두었다고 한다. 영상에 유명인사,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일상용품, 평범한 풍경등의 사진을 담았다. 원래 음악도 없었지만 사람들의 지루하다는 피드백을 수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El Watusi)를 배경음악으로 깔게 된다.




Thingless


2층의 전시는 최초의 영감이 어떻게 제품으로 완성되었으며 이후의 쓰임새는 어떠했는지, 저마다의 물건에 담긴 다채로운 이력과 비화가 상세히 소개된다. 의자, 전등, 라디오, 주전자, 전화기, 신발... 수백 가지 사물에 둘러싸여 그것을 만지고 사용하며 함께 살아가지만, 자주 혹은 오래 쓰는 물건일수록 그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오히려 잊어버리기도 한다. 기발한 형태로 존재감을 뽐내기 보다 우리 삶의 소박한 동반자로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오래 남기를 바라며 그가 내놓은 물건들은 미처 지각하지 못했으나 이미 편재해 있었던 삶 속의 평범한 아름다움을 새삼 우리에게 일깨운다.


Thinking man's chair

이 빨간 의자는 '생각하는 남자의 의자'이다. 어느 날 제스퍼모리슨이 길을 걷다가 수리를 위해 덮개를 벗긴 오래된 의자를 보게 된다. 그것에 영감을 받아 철골구조만 남긴 의자를 디자인했다. 의자를 완성하고 나서 적색산화방지 페인트로 의자를 칠한다. 장식적인 면보다는 산화방지라는 기능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 후 너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의자에 분필로 치수를 적고 스프레이로 마감하여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팔걸이 끝에 있는 원형 판자는 음료 잔을 두라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 이 의자의 이름은 'drinking man's chair'였는데 의자 모형을 고르기 위해 파이프 담배 가게에 갔다가 매력적인 담배가게 광고 포스터의 카피를 보고 이름을 변경했다. 포스터에는 '생각하는 사람은 피터스 담배파이프를 피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사실 이 의자는 제스퍼모리슨의 졸업작품이고 졸업전시에 온 카펠리니(이탈리아 명품 가구 브랜드)관계자가 이 졸업작품을 보고 제스퍼모리슨을 영입했다. 이 의자는 제스퍼모리슨의 디자이너로서의 발판을 마련해준 의자인 것이다.


Universal System (Cappellini, Italy)

이 수납장은 카펠리니사와 협업한 작품이다. 원래 제스퍼모리슨은 정리를 잘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에 출시되었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컴퓨터가 자신의 자료를 잘 정리하는 것을 보고 수납장 디자인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디자인 소재로서 수납장이 인기가 없어 더욱 주목받았다. 실제로 전시되어 있던 수납장은 제스퍼모리슨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Plywood chair

Plywood chair는 제스퍼모리슨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합판의자이다. 합판 의자를 이렇게 만든 이유는 직접 의자를 제작하려고 하니 그가 가진 장비가 전기 실톱과 제도용 곡선 자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 가지 장비로 합판을 몇 가지 모양으로 잘라 입체적인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얇은 합판으로 만든 시트 아래의 가로 대를 곡선으로 잘라서 5mm의 공간을 확보해 완충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외에도 제스퍼모리슨의 작품 곳곳에는 사용자를 위한 배려가 녹아있었다. 그리고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원초적 기능만 남기기 위해 과감히 의자의 등받이를 없앴는데 이후 등받이를 추가한 모델보다 훨씬 인기있었다고 한다. 제스퍼모리슨이 이 의자를 만들 당시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의 화려한 스타들이 인기를 끌었고 그 사이에서 평범하고 심플한 디자인을 고집하던 제스퍼모리슨이 더 눈에 띈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handlebar table

이 테이블은 제스퍼모리슨이 21살 당시에 디자인한 레디메이드 작품이다. 유리판, 핸들바, 나무조각만을 이용해 디자인했고 이 작품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일상용품만을 가지고 어떻게 좋은 디자인을 할 지 많이 고민했다는 것이 보였다. 여기까지가 80년대 제스퍼모리슨의 초기작품이고 이후 제스퍼모리슨은 점점 장식적인 요소를 덜어내기 시작한다.


Atlas System (Alias, Italy)

이 테이블에는 정말 독특한 점이 있다. 바로 굵기가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기둥이다. 어느 날, 제스퍼모리슨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멀리서 매력적인 테이블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재빠르게 스케치를 하고 가까이 가서 유심히 살펴봤는데 알고보니 일자형식이었다. 상판의 그림자가 굴절되어 착시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착시현상에 영감을 받아 atlas system을 디자인하게 되었고 저 기둥을 만들기 위해 배의 돗대를 만드는 기술을 활용했다고 한다. 제스퍼모리슨은 이처럼 제품을 만들 때 전혀 다른 영역의 산업 기술을 많이 사용했다..



좌 : Anna G (Alessi) / 우 : Socrates (Alessi)

제스퍼모리슨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10년동안 와인생산이 직접 참여할 정도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우연히 Alessi사와 함께 와인 오프너를 만들게 되었다. 당시 Alessi사에서 팔고 있던 와인 오프너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안나오프너이다. 하지만 제스퍼모리슨은 발레리나 모양을 형상화한 안나오프너를 보고 쓸데없이 장식적이라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능적인 면에 충실한 옛 오프너를 다듬어 디자인하게 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오프너의 이름은 'Socrates'이다. 이름이 너무 적절하다고 생각했던게 소크라테스가 문답법을 통해 상대방의 답을 이끌어내듯이 와인병이 코르크 마개를 이끌어낸다는 의미같았다.


Glass family (Alessi)

와인은 손의 온도가 전해지지 않아야 같은 맛이 유지되기 때문에 와인잔에 기둥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와인에 대한 조예가 깊은 제스퍼모리슨은 Alessi사의 요청으로 디자인한 와인잔의 기둥을 없앤다. 제스퍼모리슨이 가져온 디자인에 놀란 Alessi사가 왜 기둥이 없냐고 묻자 그는 와인을 마실 때 굳이 기둥이 필요 없고 와인잔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 오히려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Alessi사는 그 디자인이 소비자들에게 너무 파격적이라고 생각해 기둥이 있는 디자인을 추가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지금의 glass family가 완성되었다.


Brunch set (Rowenta, Germany)

이것은 독일의 Rowenta사와 만든 커피 머신이다. 너무 멋진 디자인이었지만 기능적 결함으로 판매되고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커피머신에는 재미있는 뒷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디자인 페어에 방문한 삼성 이건희 회장이 이 커피머신을 보고 우리는 왜 이런 디자인이 나오지 못하냐며 한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삼성은 제스퍼모리슨을 객원 디자이너로 영입해 핸드폰과 냉장고를 디자인하게 한다. Jasper Morrison | Refridgerator / Jasper Morrison | Snaps Mobile Phone /Jasper Morrison | Morrison Mobiles



Glo-ball

Glo-ball은 출시된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물들과 있을 때 그들을 압도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은은하게 분위기만 바꿔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제품의 가장 큰 매력은 라이트 부분을 만들 때 장인이 직접 입으로 불어서 만든다는 점이다. 그래서 완전히 동그란 구 형태가 아니라 입김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가 나온다. 이런 점이 글로볼의 은은한 빛과 만나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Cork Family (Vitra, Switzerland)


위의 사진은 vitra의 코르크 의자이다. 어느날 제스퍼모리슨이 코르크 참나무 숲을 걷다가 코르크의 기능적인 면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방수성, 방부성 뿐 만 아니라 흰개미의 피해를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에서는 흰 개미가 목재 가구를 갉아먹어 발생하는 피해가 상당한데 코르크를 사용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제스퍼모리슨은 코르크 공장에 가서 남은 코르크가루와 완전히 분쇄되지 않은 코르크 마개를 압축해 위와 같은 의자를 디자인하게 된다.

Air chair (Magis, Italy)


이 의자가 air chair라고 이름 붙혀진 것은 공기 주입식 주도 기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보통 의자를 디자인할 때에는 좌석 부분을 만들고 나머지 부분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이 의자는 공기가 주입된 플라스틱 튜브를 다리로 사용함으로써 다리를 만들고 한꺼번에 좌석 부분까지 만드는 원몰딩 방식으로 디자인되었다고 한다. 이음새 부분을 만드는 것이 너무 까다로워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했다고 들었다. 에어 체어는 실내 뿐만 아니라 실외에서 사용하기도 좋다. 좌석 부분에 있는 구멍을 손잡이로도 쓸 수 있고 덕분에 비가 왔을 때 배수도 원활하다.


Basel chair (Vitra, Switzerland)


Basel chair는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체어,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네오 체어라고 부른다. 전체를 틀로 찍어낸 플라스틱 의자들이 카페나 레스토랑에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성능 면에서 더 뛰어난 의자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중 자주 제스퍼모리슨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형태의 의자였다고 한다. 그 뒤로 고민을 시작했고, 좌석과 등받이를 플라스틱 폴딩으로 만들면 이 형태의 의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소재 대비나 다양한 색의 사용으로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의자에서 가장 좋은 디테일은 의자 다리의 윗부분과 등받이의 연결부위다. 이는 비트라 제품 개발팀의 수석 기술자 토마스 슈바이 게르트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이 의자를 완성하고 나서 결과에 꽤 만족해 밀라노에서 처음으로 선보일 때 좌석과 등받이가 플라스틱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무에 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 의자의 핵심은 동그란 이음새에 있는데 접착제가 아니라 클립형태로 딱 들어맞게 디자인 되었다고 한다.

Hal chair (Vitra, Switzerland)


할 체어의 감싸는 듯한 좌석 모양은 2007년 '비트라 에디션'프로젝트를 위해 디자인한 코르크 체어에서 발전한 것이며 폴 케흘름의 아름다운 PK9의자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았다. 최고의 편안함을 구현하기 위해 3년 동안 형태와 소재를 바꿔가며 좌석을 개발했고 이는 제스퍼모리슨의 최장기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다양한 의자의 종류와 사람이 앉는 다양한 상황을 최대한 반영하는 제품군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실제로 이 의자는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소비자가 직접 커스터미이징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제스퍼모리슨은 신발, 안경, 일상용품 등 지대한 분야에 손을 뻗고 있는데 최근에는 지지바바라는 남성복까지 런칭했다.




The good life



나는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며 찍을 대상을 찾는 것을 좋아한다. 해를 거듭하면서 이 습관은 수집가의 집착과 비슷해졌다. 전문적인 사진가처럼 아름다운 구도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보다는 그저 내 눈에 인상적인 장면을 단순하게 기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좋은 사진기가 아니어도 왠만하면 항상 들고 다니는 작은 캐논 카메라나 아이폰만으로도 충분하다. 여러 해가 지나며 사진은 수천 장이 되었고 컴퓨터로 한 눈에 모아 놓고 보니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일상적인 문제를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영리하게 해결한 것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그것이다. 이처럼 본능적인 인간의 활동이 바로 내 일의 뿌리다. 디자이너는 사람들 누구나 가진 철저한 실용적 사고와 상식적 논리가 없다면 애초에 펜을 들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그런 장면을 내가 찍은 사진에서 수집하며 이면에 숨은 맥락을 상상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다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읽다가 자극을 받아 내 상상을 글로 적어서 사진에 곁들이기로 했다.


제스퍼 모리슨에게 좋은 삶이란 '좋은 물건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물건은 우리 삶에 어울려 있지만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통해 제스퍼모리슨이 스스로 터득한 개념은 ‘Super normal'이고 이는 평범하다, 평범한 것이 최고다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는 그의 작품을 잘 대변하고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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