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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May 05. 2023

뉴욕대생에 대한 오해 2

얼마 전 독재자의 손자가 대중 앞에 나서 친가와 지인들의 죄를 폭로하고 사죄했다. 인스타와 유튜브 라이브로 소통도 이어나갔다. 내 또래의 사람이 할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는 걸 SNS로 지켜보는 기분은 참 오묘했다. 한국 근현대사에 족적 남길 이벤트가 이제 이런 모습인 걸까. 그의 SNS에 접속해 '저격당한' 지인들을 하나씩 보는데,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죄다 뉴욕대학교 출신이었다. 독재자의 손자와 그 주변의 부잣집 자제들이 뉴욕대학교에 다녔구나. 내가 다녔던 시기에. 당연히 그랬겠지. 하지만 현타가 진하게 왔다. 나의 대학 생활은 저들과 얼마나, 어떻게 달랐을까.


나는 포지션이 애매했다. 아니, 특별했다고 하자. 내 전공인 '시네마 스터디스(Cinema Studies)'는 쉽게 말하자면 '영화학과'다. 전공 수업은 당연히 티쉬예술대학(Tisch School of the Arts) 건물에서 들었다. 하지만 난 CAS(College of Arts & Science), 즉 인문대학교 소속이었다. CAS에서 4년 장학금을 받고, 연구지원금도 받고, 프레지덴셜 아너스 프로그램에 합격해 프라하도 다녀왔지만 나는 티쉬를 내 '홈 스쿨(home school)'로 여겼다. 왜? 더 유명하니까. 레이디 가가, 우디 앨런, 이안, 클로이 자오, 줄리 델피, M. 나이트 샤말란, 도날드 글로버, 스파이크 리... 그런 사람들을 '학교 선배'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시네마 스터디스'는 원래 티쉬에 소속된 학과였지만, 연구 과정에서 사회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심지어 철학까지 아우르기 때문에 인문대에서도 전공 신청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인문대 학비로 예술대 전공을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술대 학비가 더 비싸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학과 철학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시네마'를 소재로 인문학적 사유를 하는 이 학과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뭘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했을까 싶지만, '스탠리 큐브릭같이 영화를 만들 수 없을 텐데 굳이 왜 시도하나' 이런 마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인생 첫 영화가 무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암튼 그렇게 난 인문대학 소속으로 예술대학을 다녔다. 누군가 전공을 물어보면 '영화를 배우지만 만들진 않는답니다!' 하는 설명이 필수였다. 인문대학생이면 들어야 하는 교양과목도 다 들었다. 심지어 물리 과목까지. 수학 과목은 고등학교 시절 머리털 뜯어가면서 공부한 AP Calculus의 시험 성적을 제출해 면제받을 수 있었다. 좋았던 수업은 다 전공 수업이었다. 1, 2학년 때 배짱 좋게 4학년 때나 듣는 심화 세미나 수업을 골라 들으면서 전공을 정말 즐겼다. '그릭 위어드 웨이브'(Greek Weird Wave), '마인드 게임 필름'(Mind-Game Films), '재즈 앤 시네마' 이런 제목만 봐도 재밌는 수업들만 쏙쏙 골라 수강하면서 말이다.


강의실 밖에서의 대학 생활은... 글쎄, 나답게 그리 다이내믹하진 않았다. 광란의 클럽 파티나 흑역사 삼을 만한 틴더 데이트 이런 것도 없었다. 틴더를 깔아본 적도 없다. 첫 수업때 하는 자기소개도 싫어하는데 웬 앱에다가 자기 PR을 하라고? 노 땡큐다. 뉴욕대학교 유학생다운 에피소드를 만들기에 난 원체 집순이에다가 사람 많은 데 가는 걸 싫어한다. 그래도 몇 가지 웃긴 기억은 있다. 신입생 때, '그래도 네트워킹을 하는 게 중요하겠지' 싶어 뉴욕대 한인학생회에 가입했다. 가입만 했을까. 고등학교 때 동아리 회장직을 세 개씩이나 맡은 그 버릇을 남 못주고 학생회 임원까지 했다. 정장 사 입고, 한국인들 앞에서, 한국어로 면접 봐서, 한국 학생회 임원이 되는 짓을 왜 했나 싶지만.


역시 학생회에는 부잣집 자제분들이 많았다. 클럽을 빌려 인근 패션스쿨의 학생회와 함께 펀드레이징 파티를 자주 만드는 듯 했다. 임원 회의에서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때 허공을 바라본 적도 많다. 서울 모 클럽의 VIP가 되신 경위, 누가 오는 파티에서 어떤 수위로까지 놀아보셨는지 하는 무용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마초는 애교 수준이다. (나같은 집순이에 범생이도 마리화나 한 번 펴 볼 기회는 온다. 담배보다 흔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유학 간 부잣집 탕아는 실존했다. 아주 생생하게, 내 주위에. 한 번은 아버지가 어찌어찌해서 군대까지 면제시켜 줬다는 소리를 듣고 앉아 있었다. 한국에 있는 우리 오라버니를 불러다가 얘네 좀 다 한 대씩만 때려달라고 해야 했는데. 그렇게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깨닫고 학생회에서 냉큼 탈퇴했다. 잘 한 결정이었다. 학생회 이벤트에서 만난 언니 한 명이랑은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 언니나 나나 중산층–그중 약간 위쪽에 위치했다고 하자–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진로와 경제적 자립에 대한 걱정을 하는 그런 나름 '평범'한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4년 간 1억 5천이 넘어가는 금액의 장학금을 받았다고 해도 집안을 거덜 내는 수준의 학비가 들어갔다. 매 학기마다 올 A를 사수해 다음 학기에 추가 장학금을 달라고 어필해 봤지만 학교에선 용돈 수준의 금액을 얹어줬다. 500불, 1000불 이런 포켓 머니 수준의 '추가 장학금.' 가끔은 얘네들이 정말 누굴 놀리나? 싶었다. 아직도 나는 학교에 지원할 때 정직하게 써서 낸 소득 증명 서류를 위조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학금 금액이 올랐을 테니까. 어느 회사 사장님 자제분, 어디 건물주 자제분께서는 집안 소득을 후려쳐서 반액 장학금, 전액 장학금 받았다는 썰을 들을 때면 엄마나 나나 땅을 치고 후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 한 학기 휴학하고 씨네21에서 일하며 번 돈, 영화제 이곳저곳에서 번 돈으로는 뉴욕의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용돈을 받고, 엄마 카드를 써야만 했다. 나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식비를 아꼈다. 외식은 한 달에 한두 번만 하고, 학교 식당에서 서너 끼는 때울 수 있는 양의 음식을 집으로 싸 오곤 했다. 그래도 시험 기간이 되면 배달앱을 끼고 살았다. 배달료에 팁까지 얹어야 하는데도. 나는 생활고에 시달릴 필요는 없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분명 뉴욕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학생 중에 절박한 이들도 많았으리라. 가족 중 처음으로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이라 전액 장학금이 나온다거나, 자력으로 학비에 생활비까지 대느라 밤낮없이 일한다거나 하는 이들도 있었겠지.


나는 4학년이 되어서야 뉴욕에 정을 붙였다. 모마, 휘트니, 구겐하임 같은 으리으리한 미술관도 좋지만, 웨스트 빌리지 어딘가 위치한 작은 갤러리, 카페, 레코드샵 같이 나만의 핫스팟을 발굴했다. 단골이라고 부를 만한 피자집도, 샐러드집도 생겼다. 하이라인을 걸을 때면 뉴욕에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OPT 없이 뉴욕 취업은 힘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영화계가 아니면 아무 소용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현실적이었다.


팬데믹의 여파로 심심한 온라인 졸업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취업 시장에서 나를 '뉴욕대학교 수석 졸업생'으로 소개했다. 뉴욕대생이라면 응당 받게 되는 오해를 미리 차단하고 싶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별 다른 노력 없이 화려한 뉴욕 생활을 즐기다 온 그런 사람으로 비치기엔 난 꽤 노력하고 살았으니까. 어쩌면, 더 즐길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뉴욕대생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나에게 마일드한 피해의식으로 작용한다. 아무도 나보고 뭐라고 안 했는데, 해명하고 싶게 만드는.


어찌 됐든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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