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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Apr 19. 2023

뉴욕대생에 대한 오해 1

뉴욕대학교는 아이비리그 대학교가 아니다.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 프린스턴... 이런 학교 하고는 느낌이 아예 다르다. 뉴욕대학교를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좋은 학교 갔네." "집이 부자인가 보네." 반면 아이비리그 대학교는 다닌다고 하면 왠지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 듣고 자라서 기특하게 장학금까지 받고 간 인상을 준다. 아직도 '분수 하나 파주고 들어가는' 기부 입학이 많은지는 알 수 없지만. 암튼 뉴욕대학교는 공부를 잘해서 갔든 어쨌든 돈이 있어서 간 네임밸류 있는 학교라는 인식이 강하다.


나도 중학교 때까지는 아이비리그 진학이 목표였다. 부모님은 중학생이었던 나를 데리고 미국 여행을 빙자한 아이비리그 투어를 갔다. 그 대학들의 캠퍼스를 직접 가본 건 내게 큰 동기부여가 됐다. 부모님의 플랜이 제대로 먹힌 거다. 나는 누가 공부하라고 하면 반항심에 하기 싫어했지만, 아무 말 없이 '이런 것도 있단다' 하고 보여주면 혼자 학구열을 불태우는 그런 애였다. 캠퍼스는 사실 프린스턴이 예뻤는데 당시엔 미술이나 건축 관련 전공을 생각 중일 때라 예일대학교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예일대를 찜해놓고 한국으로 돌아와 미친 듯이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 가장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나 싶다. 교과서를 몇 번이고 필사하는 수준이었으니. 중3땐 전교 5등 안에 든 애들과 함께 교장실에 불려 가 칭찬받고, 자연스럽게 특목고나 자사고 진학을 권유받았다. 졸업식에선 웬 정치인에게 표창장을 받았다. 그리고 2014년, 용인에 위치한 자사고인 외대부고의 국제과정에 입학했다. 예일대학교 진학에 한 발짝 다가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곳은 밖에서는 비범했던 게 한 없이 평범해지는 곳이었다. 부잣집 애들이 공부까지 잘하는 건지, 부잣집 애들이라 공부를 잘하는 건지... 물론 부족함을 느끼며 크진 않았지만 나는 부잣집 딸도 아니고, 그 애들에 비하면 특출 난 재능이 있다거나 공부를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기숙사 학교에서 매일 열등감을 온몸으로 처맞았다.


고2 때 난생처음 30점대 점수를 받고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들 힘들어하는 미적분학(Calculus) 시험이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곤 하지만 내 인생의 바닥이 여기구나. 예일대학교는 무슨.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GPA를 가지고 나는 어떤 대학교에 지원서를 써낼 수 있을까? 이제라도 수능 공부를 해야 하나? 그런 불안감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난 항상 1등을 하고, 누군가를 제치고 앞서 나가는 그 느낌이 좋아서, '승부욕' 때문에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그 '바닥'을 찍고 나선 생존욕구 비슷한 걸 가지고 공부했다. 외대부고 내에선 '인문이든 자연이든 여기서 꼴찌 해봤자 이대는 간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국제과정에서 꼴찌 하면 어디 간다는 소리는 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커뮤니티 칼리지로 도피유학 가는 꼴 나긴 싫었다.


공부는 잘 되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작정 하는 거다. 나는 세계사, 생물학, 중국어를 선택 과목으로 수강했는데 셋 다 암기할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교과서를 필사했던 짬은 어디 가지 않았다. 예일대학교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았지만 이름 대면 아는 대학은 가자는 심정으로 이 악물고 공부했다. 덕분에 고2 2학기부터는 GPA를 많이 끌어올렸다. 어떤 과목들은 전교권에 들기도 했다. 강남에서 비싼 돈 주고 과외하는 애들과 싸워 이겼다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물론 나도 나중에 가서는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미적분학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


고3. 결전의 시기. 열 개가 넘는 미국 대학교에 지원서를 써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꼭 미국이어야만 했을까 싶다. (학교에서 미국 수능인 SAT를 공부하고, AP(Advanced Placement) 과목들을 선택 수강했으니 시야가 많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이비리그는 써봤자 그리고 붙어봤자 장학금을 한 푼도 못 받을 게 뻔했다. 그래서 국내 인지도는 낮지만 랭킹은 나쁘지 않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 위주로 지원했다. 지원목록에 마지막 남은 한자리는 '인지도 있고 랭킹도 괜찮은데 들어가기는 꽤 쉬워 보이는', 솔직히 말하면 좀 '만만한' 뉴욕대학교로 정했다. 외국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안 주기로 유명한 곳이라 붙어도 못 간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지원은 해보고 싶었다.


두세 개 대학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비슷비슷한 금액의 장학금 오퍼와 함께 합격레터가 날아왔다. 와중에 뉴욕대학교는 스카이프 인터뷰를 요청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치고는 이미 합격한 대학들 중 어느 곳이 좋을까 고민했다. 오하이오는 어떤 곳일까. 시애틀은 어떨까. 너무 시골로 가면 인종 차별 많이 당할 것 같은데. 다른 곳은 다 그냥 합격했는데 뉴욕대만 인터뷰를 본 게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난 뉴욕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뉴욕대학교에서 합격 소식과 함께 장학금 오퍼가 왔다. 합격한 다른 학교들과 비슷한 금액이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 안을 막 뛰어다녔다. 서재에 있는 아빠와 오빠에게 '뉴욕대학교에서 장학금 준대!' 소리치고는 만취한 사람처럼 Jay-Z의 Empire State of Mind를 막 불러 젖혔다. 이미 마음이 뉴욕으로 가 있었다. 나에게 뉴욕대학교는 그렇게 왔다. 기대하지 않았던 희소식으로. 천문학적인 학비에 비하면 아쉬운 금액의 장학금이었지만, 그 장학금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어릴 때 영재 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뉴욕대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한 그 순간은 온전히 내가 쟁취해 낸 성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땐 몰랐다. 뉴욕대에는 훌륭하고 비범한 애들과 비례하는 수만큼 '쟤가 어떻게 여기를 왔지'싶은 애들이 있다는 걸. 돈 좀 있으면 쉽게 들어가는 '겉으로만 명문'이라는 뉴욕대학교의 오명은 부분적으론 사실이었다. 뉴욕대생, 특히 뉴욕대 유학생에 대한 오해 역시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 정도는 맞다. 금수저. 도피유학. 돈 처바르는 미술 유학. 빵빵한 커넥션을 통해 월스트리트로 직행하는 경제경영 유학. 참 많이도 봤다.


하지만 나는 그런 오해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고 '나는 달라!' 하며 자기 방어를 해야 했다. 어떻게 달랐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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