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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Mar 19. 2023

리스, 쥐, 그리고 마약상 3

2022년 10월 중순, 에든버러의 해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브런치를 먹고 할 일을 조금 하다 밖을 보면 해가 지고 있는 수준이었다. 세시 반이 되기도 전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이 망할 스코틀랜드…' 읊조리곤 했다. 그래도 더 이상 플랫에 쥐는 나오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불행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내 플랫은 오래된 테너먼트 건물이라 천장이 굉장히 높았는데, 거기에 일산화탄소 경보기가 달려있었다. 다시 말해 경보가 울리면 처치곤란인 거다. 그런데 천장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경보기에 배터리가 부족해서 나는 경고음이었다. 삑- 삑- 신경을 긁는 소리가 한참을 나다가 멈추고 또 소리가 나기를 반복했다. 나는 의자 위에 올라서 긴 막대기를 들고 팔을 뻗어봤지만 경보기 버튼을 누르기엔 한참 모자랐다.


사다리 까짓 거 내가 사고 말지, 나는 대충 챙겨 입고 나와 종종걸음으로 만물상을 찾았다. 여기선 아무도 못 알아들을 한국어 욕설을 내뱉으며 리스의 거리 위를 걸었다. 오후 네시밖에 안 됐는데 왜 깜깜한 거야, 제길. 도착한 만물상에서 나는 3단 사다리를 구매했다. 생각보다 꽤 비싸서 카드를 꺼내며 또 속으로 욕을 삼켰다. 올바른 언어생활은 그럴 만한 환경이 주어져야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하루하루였다.


그렇게 무거운 사다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5분 남짓한 거리를 뛰어 플랫에 도착했다. 사다리를 펼쳐 3개의 계단을 올라 손을 뻗었는데, 경보기에 안 닿았다. 이제는 욕이 아니라 웃음이 나왔다. 나는 왜 아무도 안 보는데서 콩트를 찍고 있는 건가. 코웃음을 치며 긴 막대기를 들고 와 간신히 전원 버튼을 눌러 소리를 끄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개운함도 잠시. 배터리를 갈기 위해 본체를 돌려서 빼자마자 그 구멍에서 쏟아지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하, 집에 가고 싶었다. 이게 과연 내 집인가.


나는 콜록대면서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천장을 노려봤다. 배터리를 갈아서 다시 끼우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싱크대 밑 서랍 안으로 경보기를 던져버리고, 천장에 작은 실철사 뭉태기를 쑤셔 넣어 구멍을 막았다. 천장에서 쥐가 떨어지는 상상을 해버렸기 때문에 막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며칠 뒤, 이번엔 뱃고동 소리와 맞먹는 볼륨의 초인종 소리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띵동- 하는 경쾌한 소리가 아니라 재난 경보 사이렌처럼 와앙- 울리는 그런 소리. 건물 입구에는 내 플랫을 포함해서 총 열여섯 개의 플랫에 연결된 초인종이 붙어있었다. 나는 밖에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플랫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들이 무작정 내 플랫의 초인종을 울리는 듯했다. 공용현관 키를 챙기는 걸 까먹은 이웃인가? 여기 살지 않는데 들어오려는 사람인가? 알 길이 없으니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벨은 더 세게 울렸다.


이 낯선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아시안 여자. 나는 내 신분을 생각하며 지레 겁을 먹었다. 그 누구라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최약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계속 반응을 하지 않자 밖에서 벨을 누르던 사람은 다른 플랫의 벨을 눌러 건물로 들어온 듯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하려 현관문에 달린 작은 외시경으로 밖을 봤다. 바로 옆 플랫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옆집 이웃이었던 건가? 키를 두고 나갔었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고 조금은 안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벨이 울렸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또 옆 플랫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전투자세를 갖춘 후 플랫에서 나와 그 집 문을 두드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안에서 분명 여자와 남자가 실랑이하는 듯한 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내심 그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위험한 사람들이면 어떡하나. 그래도 화가 난 티를 분명히 내기 위해 문을 몇 번 더 두드렸다. 안에서 소리가 잠잠해지자 나는 아무런 소득 없이 플랫으로 돌아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벨이 울리는 소리를 아예 차단해 버리는 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 같았다. 십자드라이버로 인터폰이라기에는 조금 원시적인 수화기를 분리해 보니, 밖에서 벨을 누르면 금속판이 세게 진동하며 소리를 내는 구조인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진동을 막으려 금속판 옆에 화장솜을 잔뜩 넣어 고정시켰다. 아무리 눌러봐라 내가 꿈쩍하나. 나는 그날 나만의 작은 승리를 만끽하며 잠에 들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다른 플랫을 괴롭히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도대체 누가, 왜 이러는 건지 알고 싶어 현관 외시경으로 밖을 계속 관찰했다. 옆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매번 달랐다. 매번 남자였다. 옆 집에서 러시안 악센트가 강한 아줌마가 나오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분명히 술이든 약이든 뭔가에 취한 모습이었다. 저 집을 찾는 남자들은 그 아줌마의 아들인가? 상당히 대가족인가? 싶었다가, 여기 혹시 성매매 합법인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


며칠 후, 새벽 세시. 창문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건물 밖에서 옆 집 창문을 깨는 소리였다. 언제든 내 창문도 깨질 수가 있겠구나 싶어 아찔했다. 손이 떨리는 공포를 맛봤다. 밖에서 누군가 술에 취한 목소리로 한참 소란을 피우다 잠잠해졌지만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자는 사이 창문이 산산조각 나서 나에게로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아서. 다음날, 결국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었답니다' 하며 의젓한 척을 하려 했지만, 순식간에 무너져서 엉엉 울었다. 쥐, 화재경보기, 초인종 소리, 깨진 창문. 이곳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한 게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최악의 선택 같았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에게 도대체 왜 여기로 왔냐고, 썩 꺼지라고 저주하는 것 같았다. 이십 대 중반의 딸이 스코틀랜드에서 전화를 걸어 '나는 잘못된 선택만 하고 사는 것 같다' 하며 우는 걸 듣고 있는 엄마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엄마는 분명 안전하지 않는 상황이니 이사 갈 곳을 찾아보라고 했다. 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에어비앤비, 사설 기숙사, 아파트호텔... 원룸처럼 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는 심정으로 이사 갈 곳을 검색했다. 당장 내일 이 플랫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꽤 빠르게 '쉐어룸'이라는 앱을 통해 뷰잉을 잡을 수 있었다. 큰 저택에 빈 방을 내놓는다는 글이었는데,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다. 유료멤버십을 결제하고 집주인에게 바로 연락하는 기능을 사용해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최대한 빨리 이사를 가려는데, 이 방이 너무 좋아 보인다. 나는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석사 공부를 하고 있고, 간간이 프리랜서 일도 하며, 모아둔 돈도 있어서 그걸로 월세를 꼬박꼬박 낼 수 있다. 당연히 나 좀 여기서 꺼내달라, 살려달라는 얘기는 뺐다.


며칠 후, 밖에서 소리가 나 창문 밖을 내다보니 경찰차가 와있었다. 드디어 올게 왔구나. 누군가가 소음 신고를 했구나. 스코틀랜드 경찰 화이팅! 저 사람들 좀 혼내주세요! 하며 구경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들어와 옆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수색하다 경찰들이 돌아갔는데, 처음엔 살살 피하던 옆 집 사람들이 기세등등해졌는지 경찰들에게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 뭘 잘했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소음 신고를 받고 집 안을 수색할 이유는 없는데,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하나 싶다. 경찰이 왔다간 후 옆 집은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겨 학기를 마치고 연말에 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기 중에 이사를 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으니까.


하루는 오전 강의를 듣고 플랫으로 돌아와 랩탑으로 과제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렸다. 경찰이었다. 경찰은 ‘최근에 옆 집에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본 적 있냐’고 물었다. 나는 키가 큰 그 여경을 내심 멋있다고 생각하며 ‘본 적 없다’ 답했다. 경찰이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냐’고 하자, 나는 괜히 긴장을 한 채로 문을 열었다. 뭐, 차라도 내려드려야 하는 건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에 벙쪄있는데, 경찰이 다소 심각한 목소리로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Your neigbours nextdoor have been evicted.

너의 옆집 사람들은 퇴거당했어.

They were involved in serious drug offence.

심각한 마약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거든.

If you see anyone trying to get into the flat, you should call 999 and report it.

누가 옆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 걸 보게 되면, 999로 전화해서 신고해.

It is our emergency number.

긴급 신고 번호야.


맙소사, 이제야 모든 게 설명이 됐다. 열쇠 없이 건물로 들어와 옆집을 드나들던 의문의 남자들. 매번 바뀌던 사람들. 마약을 구하러 온, 말하자면 ‘고객’이었던 거다. 내 이웃이 다름 아닌 마약상이었다. 총과 마약이 판을 치는 미국에서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걸 스코틀랜드에서 경험하는구나.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총기 사고가 나고, 이따금씩 총소리 같은 게 들리던 건 뉴욕이었는데. 나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리스에서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내 이웃이 중범죄에 연루된 마약 중독자이자, 마약상이었다니.


그들이 쫓겨났든 말든 나는 이 플랫에서, 리스라는 이 동네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리스, 쥐, 그리고 마약상. 끔찍한 콤비네이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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