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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Mar 15. 2023

리스, 쥐, 그리고 마약상 2

땅콩버터를 바른 쥐덫 네 개와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일어나질 말았어야 했나. 냉장고와 싱크대 사이에 작은 쥐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쥐덫에 걸려 몸통이 그대로 눌려버린 듯했다. 다행히 유혈사태가 발생하진 않았다. 아무튼 아침부터 그 광경을 보니 충격을 세게 받아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소파에 머리를 박았다. 저걸 대체 어떻게 치워야 합니까.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오전 강의가 있으니 그게 먼저였다. 그렇게 죽은 쥐를 플랫에 두고 학교에 갔다. 그새 쥐가 부활해 플랫을 누비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 저녁의 나에게 사체 처리를 미룬 거다. 저녁에 플랫으로 돌아가기가 죽도록 싫었지만 죽은 쥐와 함께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낯선 스코틀랜드에서 아무리 외로워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죽어있는 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저걸 집어 들기 위해선 무장이 필요하다 싶어 일단 고무장갑을 끼고, 그 위에 비닐장갑까지 꼈다. 꼬리가 몸통에 비해 너무 긴 것이 소름 끼치도록 싫어서 내 시야를 흐려야겠다는 생각에 부엌에 불을 끄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걸레를 주워 들었다. 


그 상태로 한 오분은 서있다가, 이 숨 막히는 정적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 같아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틀었다. 빌리 홀리데이의 <Good Morning Heartache> 중고 음반이었다. 그렇게 야밤에 거실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로 고무장갑과 비닐장갑을 낀 손에 걸레를 들고 부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부엌을 바라보며 앨범을 끝까지 듣고 서있었다. 트랙 14개가 모두 재생되도록 아무것도 못했다. 만졌는데 움직이면 어떡하지? 들어보니 피가 나면 어떡하지? 별 생각을 다 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무 생각도 못하고 그저 시간만 보냈다. 앨범이 한 바퀴를 돌고 처음부터 다시 재생되자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최대한 고개를 뒤로 꺾은 채로 한 번에 잡아서 쓰레기봉투에 그대로 넣는 작전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막상 해보니 순식간이었다. 그 쓰레기봉투에 쥐를 집어드는 데 쓴 걸레까지 넣어버리고 꼭꼭 묶어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가 쓰레기통에 냅다 던져버렸다. 성취감은 전혀 없는 미션 컴플리트. 


그 쥐 한 마리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면 좋았을 텐데 인생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부엌과 거실을 돌아다니는 쥐와 마주쳤다. 도합 다섯 번은 봤다. 다 같은 놈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종이 울리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쥐가 나오면 기계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쿵쿵 뛰면서 쥐들이 도망가도록 만들었다. 


견딜 수가 없어 플랫에 쥐약을 두고 간 구제 업체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나 그때 그 아메리칸 악센트를 가진 코리안 걸이다, 기억하지?' 물었다. 기억난다는 남자에게 나는 땅콩버터를 발라 둔 덫에 잡힌 쥐를 처리한 얘기부터 계속 쥐가 보인다는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남자는 땅콩버터는 내가 쳐놓은 쥐약의 해독제라며 태연하게 '치우는 게 좋을 것'이라 했다. 무슨 K 성분이 해독 작용을 한다고 설명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칼륨 얘기를 한 것 같다. 땅콩버터에는 왜 칼륨이 많이 든 걸까. 쥐가 해독을 한다잖아.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쥐덫을 치우려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쥐가 한 마리 또 죽어있었다. 쥐덫에 걸려서.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넘어져서 저번 사체보다 쥐의 꼬리가 더 잘 보였다. '쥐꼬리'라는 표현은 분명 너무 작고 하찮을 때 썼던 것 같은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쥐꼬리는 꽤 임팩트가 강한 걸요. 빌리 홀리데이가 한 시간 넘게 노래 부를 동안 아무것도 못했던 저번과는 다르게 비교적 빠르게 처리했다. 나는 그 길로 땅콩버터 쥐덫도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돌아와, 쥐가 싫어한다는 페퍼민트향이 강한 에션셜 오일을 들이붓고 향을 피웠다. 


아마존에서 주문한 초음파 기계도 콘센트에 꽂았다. 벌레나 쥐들이 싫어하는 주파수를 계속 만들어내는 기계라는데,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뉴욕에서 바퀴벌레 나왔을 때 이걸 꽂은 후로 한동안 잠잠했던 기억이 있어 살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잠시 피신해 있을 에이비앤비를 찾아보기도 했다. 결국 예약까지 가진 않았지만.


며칠 뒤 집주인 노부부와 잘 알고 있는 듯한 배관공이 왔다. 쥐가 드나드는 통로를 막고 물이 조금씩 새는 싱크대 파이프까지 고쳐주러 온 그는 덩치가 큰 대머리의 폴란드 아저씨였다. 눈은 파란색 수정구슬 같아서 괴리감이 상당했다. 아저씨는 쥐가 나왔다는 얘기 들었다며 유감을 표했다. 에든버러에서 이 일을 하며 볼 꼴 못 볼 꼴을 다 봤는지 빨리 돈을 모아 이곳을 뜨고 싶다는 그에게 묘하게 공감하고 있는 나였다. 나도 빨리 석사를 마치고 이딴 곳을 벗어나 런던으로 가고 싶으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킹스 칼리지 런던의 입학 오퍼를 거절한 게 잘한 짓이었나 생각하니까.


아저씨는 칙- 뿌리면 스티로폼 같은 게 확 부푸는 익스펜더블 폼(Expandable foam)으로 벽난로 옆과 싱크대 밑바닥의 큰 구멍을 메꿨다. 한 통을 다 써도 부족해 하나를 더 사 와야 했다. 일을 마친 아저씨는 페인트칠만 깨끗이 된 이 낡은 플랫의 온수 공급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너무 옛날 방식이라며, 매일 온수를 쓰려면 스위치를 눌러 가스로 물탱크를 데워 써야 하는 나에게 또 유감을 표했다. 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저번에 스위치 누르는 걸 깜빡해 온수가 없어 주전자로 끓인 물과 냉수를 섞어 세수를 했더랍니다. 


쥐가 또 나오거나 무슨 고장이 생기면 연락하라며 아저씨는 자신의 연락처를 주고 갔다. 또 연락하는 상황이 생길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그래도 아저씨의 방문 이후로 한 일주일 간은 잠잠했다. 나는 다시 학교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 계산을 잘못해 배차 간격이 삼십 분이 넘는 버스를 놓치고 학교까지 조깅을 하는 날도 많았지만. 


그렇게 평화롭게 남은 학기를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고 있던 때, 또 다른 시련이 나를 찾아왔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플랫 안팎으로 화재경보가 울리고, 흡사 재난경보 사이렌 같은 벨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옆집이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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