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씨 Mar 10. 2023

리스, 쥐, 그리고 마약상 1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북쪽 끝에 위치한 부둣가 지역 리스(Leith). 왕실의 브리타니아호(Royal Yacht Britannia)가 정박된 해안가를 따라 바와 식당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언뜻 보면 '힙'한 동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난했던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에서 나는 힘겨운 겨울을 났다.  


2022년 9월 중순, 전쟁 같은 집 구하기 여정을 거쳐 마침내 리스에 나만의 공간을 얻게 됐다. 영국에선 '아파트' 대신 '플랫'이라고 부르니까, 나도 드디어 나만의 '플랫'을 갖게 됐구나 하는 기쁨을 잠시 만끽했던 것 같다. 비록 내 플랫 건물 뒤에 리스의 명물 바나나 플랫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바나나 플랫의 정식 명칭은 Cables Wynd House. 바나나처럼 길게 휘어져 있는 10층짜리 건물에 무려 212 가구가 산다. 과거 항구 도시에 몰린 빈곤층의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지어진 사실상 '슬럼' 하우징 시설이다.


홍콩의 구룡성채가 주는 살벌한 기운은 없지만 확실히 위협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아무래도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을 따른 건물이라, 말 그대로 조악하고 거친 외형과 질감을 가졌다. '나 영화 좀 봤다'하면 한 번쯤 들어봤을 대니 보일의 1996년작 <트레인스포팅>의 배경이 바로 여기, 리스다. 바나나 플랫도 영화에 나온다. 스코틀랜드의 작가 어빈 웰시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리스 출신 헤로인 중독자인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여기 이사 오기 전까지 이 리스가 그 리스인지 몰랐다.


암튼 바나나 플랫 바로 앞에 살게 된 나는 이 동네가 지닌 빈곤의 역사를 애써 외면하며, 물길을 따라 들어선 카페들을 하나 둘 방문해보고 있었다. 단골 가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시계탑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아기자기한 카페부터, 이국적인 느낌 물씬 풍기는 터키식 커피 전문점도 있었다. '영국인데 펍이 없으면 섭섭하지'라는 듯 아침부터 문을 여는 카페펍과 밤에만 문을 여는 피쉬 앤 칩스 펍도 눈길을 끌었다. 사실 피쉬 앤 칩스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왜 굳이 생선에 빵가루 묻혀 튀긴 걸 또 굳이 감자튀김과 함께 먹는 걸까? 이게 전통 음식이라니, 한국인으로서 조금 비웃을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최근에 알게 된 바로는 피쉬 앤 칩스가 16세기 종교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유대인들의 튀김 조리법에서 유래되었고, 산업혁명 이후 값싸진 기름을 이용해 단가를 확 낮춰 공장 노동자들 중심으로 널리 퍼진 음식이라고 한다. 쉽게 비웃기는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별로다. 그래도 거리마다 피쉬 앤 칩스 파는 곳 하나씩 있어줘야 영국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긴 한다. (물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매우 다르지만.)


리스 끝자락에는 오션터미널과 이어지는 물길이 있다. 밤마다 이 좁고 평화로운 운하를 따라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간 듯한 거리를 바라보는 맛도 있었다. 여기가 바로 에든버러가 품은 작은 베네치아가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이 낯선 도시에서의 낭만을 찾는 작업에 몰두했다.


낭만은 플랫 안에서도 찾고 싶었다. 뉴욕에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인테리어 소품을 충동구매 하기 시작한 거다. 집 바로 앞에 사람과 차가 다니니 내 프라이버시를 위해 창문에 붙이는 불투명 스티커와 커튼을 사는 건 필수였다. 귀여운 방석과 있어 보이는 꽃병, 독특한 무늬의 러그와 담요는 내가 부릴 수 있는 작은 사치였다. 턴테이블을 새로 사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아쉬운 대로 블루투스 기능이 있는 CD 플레이어도 하나 들였다. 품질보다 색을 우선시해 사이즈별로 수건도 구매했다. 이 플랫의 전반적인 '톤 앤 매너'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창 리스에 익숙해져 가던 9월 말, 내 플랫에 평생 잊지 못할 불청객이 찾아온다. 그것도 여러 번. 바로, 쥐. 쥐가 나타났다. 거실 소파에 씌워져 있는 촌스러운 커버를 큰 담요로 가려놓고, 차를 내려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밤이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해 옆을 쳐다보니 소파와 벽 사이로 쥐 한 마리가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방금 본 걸 믿을 수가 없어 3초 정도 가만히 그 쥐와 눈을 맞추다가, 이내 현실임을 자각하고 플랫이 무너져라 소리를 질렀다.


내 비명을 듣자마자 이 쥐는 잽싸게 거실을 가로질러 벽난로 옆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쥐가 도망가는 속도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하나 멀뚱히 서 있는데, 똑같은 놈인지 다른 놈인지 또 한 마리의 쥐가 벽난로 사이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더 큰 비명을 지르며 긴 막대기 같은 걸로 미친 사람처럼 거실 바닥을 두드리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쥐도 꽤 놀랐을 거다. 하지만 사과는 않겠다.


쥐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나는 바로 집주인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쥐가 나왔다. 여러 번.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쥐 처음 본다. 무섭다. 눈물 난다. 횡설수설하느라 그저 단어들을 막 뱉었다. 할머니는 차분하게 답했다. 쥐는 에든버러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고, 밖에 음식 부스러기나 찌꺼기를 내놓지 않고 깔끔하게 관리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거라고. 전혀 진정이 안 됐다.


아직 제대로 요리도 하지 않고 있고, 음식을 밖에 내놓은 적이 아예 없는데 쥐가 나온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패닉 상태인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전에 이 플랫에서 쥐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전혀 없다. 아마 다른 플랫이 최근에 이사를 갔거나 해서 쥐들이 이동하면서 잠시 들른 걸 수 있다. 내가 조만간 남편과 플랫에 들를 테니 걱정 마라. 그중 압권은 쥐는 너보다 훨씬 작고 무해하다는 얘기였다. 고맙네요. 위로가 됩니다.


집주인 노부부가 집에 온들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싶어 에든버러에 있는 모든 해충 및 설치류 구제 업체에 전화를 돌렸다.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 일단 내 플랫에 들러 뭐라도 해주라고 애원했다. 사실 그 와중에도 구글맵에 등록된 후기와 1회 방문 가격을 다 알아보고 가장 괜찮아 보이는 곳을 골랐다. 바로 다음 날, 구제 업체에서 사람이 왔다. 진한 스코틀랜드 악센트를 가진 남자였다. 남자는 에든버러는 쥐 정말 많으니 놀랄 건 없다며 쥐가 드나들 수 있는 통로나 구멍들을 찾아냈다.


벽난로 옆 카펫을 들추자 나무판자 사이로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고, 주방 싱크대 밑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쥐를 초대하는 수준 아닌가. 집이 이런데 여태껏 쥐가 나온 적이 없었다고? 집주인에 대한 신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구제 업체 남자는 일단 쥐가 이 플랫을 위험지역이라고 인식하게끔 독성이 있는 쥐약을 이곳저곳에 놓아두었다. 집주인한테 구멍 뻥뻥 뚫린 곳들 보여주며 칙- 뿌리면 부푸는 폼 같은 걸로 막아달라 하라고 조언해주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 쥐가 드나드는 통로에 임시로 바리케이드를 쳤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됐다. 남자는 영수증을 써주고 떠나기 전 궁금했는지 나에게 '어디서 왔니?' 물었다. '한국'이라고 답하자 남자가 '어떻게 아메리칸 악센트를 가지고 있냐'고 하는 거다. 한 번도 내가 미국식 영어를 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 본 적이 없어 신선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내가 뉴욕에서 영화 공부를 했고, 여기서는 미디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해버렸다. 그러자 남자는 왜 뉴욕에서 영화일을 안 하고 여기에 온 거냐고 되물었다. 뉴욕을 두고, 굳이 에든버러에.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는 대충 공부가 좋다고 얼버무리며 남자를 보냈다.


그다음 날, 집주인 부부가 왔다. 쥐덫과 땅콩버터를 들고. 집주인 할아버지는 쥐덫에 땅콩버터를 한 스푼씩 발라 싱크대 밑에 두 개, 벽난로 옆에 두 개를 설치했다. 그때까진 몰랐다. 쥐와의 사투는 이제 시작이라는 걸.





작가의 이전글 시작부터 쉽지 않다 에든버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