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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Mar 06. 2023

시작부터 쉽지 않다 에든버러

아, 에든버러. 망할 에든버러. 여긴 오기 전부터 힘들었다. 7월 말이 되어서야 나온 대학원 합격 결과 때문에 영국 비자를 신청하고 대기하는 동안 그야말로 똥줄이 탔다. 9월에 학기가 시작하는데 7월 말에 합격시키는 건 무슨 경우인지. 비자 신청을 위해선 특이하게 결핵 검사가 필요했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 '비자 신체검사실'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저 '정상'이라는 검사 결과가 적힌 종이를 받기 위해 사흘간 손톱을 뜯으며 기다려야 했다. '정상'이 맞긴 하겠지.


다행히 '정상' 결과지를 들고 남대문에 있는 영국비자센터를 찾을 수 있었다. 대사관이 아니라 비자 관련 일만 하는 영국 이민국 하청 업체 같은 곳이었다. (미국 비자 받을 때는 종로에 있는 대사관에서 긴장하며 인터뷰까지 봤는데 말이다.) 근데 거기서 하는 말이 영국 비자 신청자가 몰리는 바람에 급행 심사가 의미가 없어져 급행 신청을 닫았다는 거 아닌가. 일반 발급은 보통 3주 넘게 걸리는데, 얼마나 지연될지는 알 수 없단다. 8월 내로 비자가 나와야 그걸 들고 8월 31일에 출국을 할 수가 있는데. 출국 일정을 뒤로 미루네 마네 골머리를 앓다가, 간신히 출국 며칠 전에 나온 비자를 손에 쥐고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2022년 9월 1일, 나는 프랑스 샤를드골을 경유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진정한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너무 늦게 합격한 탓에 학교 기숙사를 신청할 시간도 없었던 나는 알아서 살 곳을 찾아야 했다. 에든버러 시내에 쫙 깔린 사설 기숙사 방을 구하던가 자취방을 구해야 했는데, 정말 방이 너무 없었다. 뉴욕에서는 대체 어떻게 자취방을 구했던 걸까. 역시 한인 부동산이 워낙 많아서 수월했던 거겠지.


에든버러에는 중국 유학생이 유독 많다. 14억 인구를 생각하면 세계 어딜 가나 많은 건 당연하지만, 에든버러엔 특히 많다. 중국에서는 에든버러 대학교가 '옥스브리지' (영국 최고 권위 대학인 옥스퍼드 대학교, 캠브리지 대학교를 줄여서 부르는 말) 다음으로 유명하단다. 유럽 취업, 여행 등을 위해 영국 학생 비자를 받고 싶어들 하는데, 에든버러 대학교는 랭킹은 높은 반면 '옥스브리지'보다 들어오기 쉽다. 피 말리는 면접 과정이 없으니.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정말 이 학교는 유학생 많이 받아서 돈 모으는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뭐, '해외명문대학교'의 유학생 장사를 하루이틀 본 건 아니지만.  


암튼 그 수많은 중국 유학생들 중 대다수가 중국의 코로나 봉쇄조치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묶여 있는 와중에,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이 대거 몰리니 방을 구할 수가 없었던 거다. 거기다 부동산에 나온 매물을 계약하기 위해서는 뷰잉(viewing, 집을 직접 둘러보는 것)을 신청해야 하는데, 개인정보란에 직업을 '학생'이라고 입력하는 순간 9할은 탈락이다. 가서 볼 수조차 없다. 이전 집주인에게 '이 임차인은 월세 꼬박꼬박 잘 냈답니다'하는 개런티 레터(letter of guarantee)를 필수로 받아와야 하는 조건도 당연히 나에겐 불리했다. 결국 글래스고에 살고 있는 엄마 고교 동창 친구의 남편분–스카치 위스키 사업으로 굉장히 성공하신 분이다–이 나의 보증인이라며 어필하기까지 했지만, 그게 내 방을 구해주진 못했다.


9월 중순, 조금 의심스러워 보이는 웹사이트에서 가까스로 집주인이 직접 방을 내놓은 광고를 찾아 두 개의 뷰잉을 잡게 됐다. 에어비앤비를 전전하는 신세만은 면하자는 각오로 첫 번째 뷰잉을 마치고, 바로 계약금과 첫 달 월세를 내는 게 가능하다며 적극적으로 나갔다. 그런데도 이 집주인은 개런티 레터가 필요하다며 거절했다. 반년치 월세를 한꺼번에 주겠대도 소용이 없었다. '그냥 내가 싫다고 말해!'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두 번째 뷰잉은 거의 포기상태로 갔다. (아예 해변가 동네 포토벨로(Portobello)에 위치한 에어비앤비의 호스트와 한 학기 장기투숙 가격을 네고 중이었다.) 


뷰잉을 가보니 옆 동네 사는 노부부가 집주인이었는데, 이들은 당연히 내가 당일 계약 후 첫 달 월세까지 바로 입금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방 하나짜리 집에 월세 750파운드, 관리비 별도였다. 집을 들어가서 보는데 크기는 나쁘지 않았다. 오래된 테너먼트(tenement, 산업혁명 이후 생겨난 '다세대주택' 건축 양식) 건물이라 중앙난방 시스템은 없었지만 나름 히터도 설치되어 있고, 무엇보다 천장이 높았다. 순간 설렐 정도로.


하지만 화장실이 웬 간이시설 같았다. '샤워부스'는 한 사람 겨우 서있을 만한 공간 밑에 물만 빠지게 해 놓고, 샤워커튼으로 공간분리를 해놓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바로 앞에 도로가 있는 건물의 1층인데도 창이 훤히 다 뚫려 있었다. 에든버러에 와서 가장 놀란 게 이거다. 어떻게 사람들 다니는 보도, 차가 다니는 도로 바로 앞에 창을 큼지막하게 낸 주거공간이 있을 수 있지? 다들 창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스티커를 붙이거나, 커튼으로 가리고 생활하는 듯 보였다. 소음이 더 걱정이었다. 


머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데 집주인 노부부는 내가 바로 사인을 하지 않자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친절하긴 했는데, 집주인은 집주인이니까. 그렇게 머뭇거리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식으로 계약서에 사인하고, 에어비앤비로 돌아가 짐을 챙겨 입주했다. 자, 이제 내가 살 곳은 에든버러 북쪽에 위치한 리스(Leith)였다. 왕실의 브리타니아호(Royal Yacht Britannia)가 정박되어 있는 오션터미널(Ocean Terminal)과 가까운 부둣가 동네. 입주할 때까지만 해도 내 이웃이 누구인지,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입주했겠는가.


학기가 시작하고 첫 수업을 들었을 때의 당혹감은 잊을 수 없다. 수업이 50분 만에 끝났다. 아무리 석사 과정이고, 영국 학계는 자기주도학습을 중시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다. 받아가는 학비를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기본적인 내용의 강의를 1시간도 못 채우고 끝내버리는 건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강의 내용과 참고 문헌 등을 다루는 튜토리얼이 그나마 내 학구적 갈증을 해소해 줬다. 그마저도 50분이라 디스커션이 좀 심도 깊어진다 싶으면 끝나버리긴 했지만. 


필수 강의가 아닌 선택 강의는 당연히 문학의 영화화/각색 수업으로 등록했다. 이건 그래도 세미나라서 2시간짜리 수업이었다. 덕분에 이론 텍스트와 문학 원작, 각색된 영화를 나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실라버스(syllabus, 강의계획서)에는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와 타비아니 형제의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Caesar Must Die),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과 오손 웰스의 <카프카의 심판>,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와 박찬욱의 <아가씨>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론 텍스트도 최대한 다양한 문화권의 예시를 다루는 논문과 책 챕터로 이루어져 있어 맘에 들었다.


하지만 리스에서 캠퍼스까지의 등하교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내가 다니는 인문학 캠퍼스는 에든버러의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올드 타운(Old Town), 로얄 마일(Royal Mile) 바로 옆에 위치해 사실상 관광지였다. 게다가 에든버러에는 지하철이 없다. 트램도 이제 막 트랙을 짓는 중이라 버스가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 도시의 도로는 8할이 일차선이다. 버스의 배차 간격은 경기도 빨간 버스 수준인데 정류장은 도보 5분 거리마다 있으니, 버스를 타는 것보다 걷는 게 빠른 경우가 많다. 


구글맵 기준으로 내 자취방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로 25분 정도의 거리인데, 실제로는 거의 1시간이 걸렸다. 여유롭게 걸어가면 1시간이 걸리는데 말이다. 버스가 갑자기 루트를 변경하거나 부분 루트만 운행하는 일이 생기면 욕지거리를 뱉으며 걸어 다니곤 했다. 어차피 더럽게 비싸기는 마찬가지지만 신분단성에, 경기버스가 그리웠다.


그래도 국가번호 +82, 빨리빨리의 민족 출신인 내가 이따금 치고 올라오는 분노를 눌러가며 에든버러의 교통에 익숙해져 갈 때쯤, 에든버러의 해가 점점 짧아지는 계절이 왔을 때쯤, 부둣가 동네 리스의 악몽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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