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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Mar 02. 2023

뉴요커는 아무나 하나 2

다시 돌아간 뉴욕은 익숙하고, 새로웠다. 


신입생 때부터 알던 교수님이 잠시 비운 집에 들어가 살게 됐는데, 운이 너무 좋았다. 무려 워싱턴 스퀘어 공원 바로 뒤, 뉴욕대학교 밥스트 도서관 맞은편에 위치한 교수 전용 하우징(Faculty Housing) 시설에 들어가게 된 거다. 나는 맨해튼과 브루클린 곳곳에 위치한 뉴욕대학교 건물들 중 밥스트 도서관을 가장 좋아했다. 한 때 건축가를 꿈꿨던 나로서는 첫인상부터 참 강렬했던 건물이다. 층고가 굉장히 높아서 탁 트인 공간에 앉아 책 읽고 공부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 도서관 바로 앞에 살게 되다니.


스튜디오지만 공간 분리가 잘 되어있고, 아파트 앞 정원과 놀이터를 내려다보는 발코니가 있는 점이 맘에 쏙 들었다. 24시간 보안을 책임지는 시큐리티와 엘리베이터까지 있었고, 월세는 1650불이었다. 비슷한 조건을 가진 스튜디오 렌트의 반값, 어쩌면 그보다 훨씬 싼 수준이었다. 소호, 웨스트빌리지 쪽 집값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입주했을 때는 조금 놀라긴 했다. 교수님이 보기보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타입이 아니었군. 교수님이 남기고 간 짐과 옷들을 안 보이는 곳에 착착 쌓아놓고, 내 물건들로 채워나갔다. 교수님이 수업 때 보여준 영화는 다 괜찮았는데 인테리어 취향은 영 아니군. 벽에 붙은 촌스러운 나비 문양의 스티커 벽지는 앙리 마티스 작품이 수 놓인 패브릭 포스터를 사서 가렸다.


나중에는 큰맘 먹고 오디오 테크니카의 턴테이블과 로지텍의 스피커 시스템을 주문해 내 음악 감상 환경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레트로에 꽂혀 파스텔 톤의 주방 가전까지 장만하고 말았다. 그래봤자 토스터, 커피포트, 블렌더 정도긴 했지만. 그렇게 나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사람처럼 온전한 내 공간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2021년 봄, 뉴욕은 복학한 나를 반겨주기라도 하듯 날씨가 좋았다. 나는 집에서 나와, 소호를 지나, 하이라인을 산책하는 호화를 누렸다. 하이라인 초입에 있는 휘트니 미술관에서 줄리 메레투(Julie Mehretu)의 개인전을 보고 그의 예술에 심취하게 된 날도 잊을 수 없다.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키노 로버(Kino Lorber)라는 영화배급사에서 인턴 일을 시작했다. 인턴십에 합격했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만 해도 뉴욕에서 영화 일을 하며 사는 미래를 그려봤던 것 같다. 더욱이 키노 로버는 에드워드 양이나 클로이 자오 같은 감독들의 초창기 작품을 북미 시장에 처음 배급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내실 있는 회사였다. 그래서 뉴욕 영화시장에 처음 발을 내딛는 그 순간이 더 설렜다. 극영화 못지않게 다큐멘터리 배급에도 힘쓰는 곳이라, 잘 몰랐던 이슈에 대해 논하는 훌륭한 논픽션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게 좋았다.


나는 배급작들의 성공적인 극장 및 VOD 개봉을 위해 언론은 물론 영화관, 미술관, 대학, 관련 기관이나 단체들을 최대한 많이 찾아 일일이 컨택하는 일명 '그래스루트 마케팅'(Grassroots marketing)을 도왔다. 주된 업무가 컨택 리스트를 업데이트하고, 컨택할 때 쓸 뉴스레터를 포맷팅하고, 직접 컨택하는 일이었다. 컨택한 곳에서 따로 스크리너(screener, 개별적으로 공유하는 워터마킹 된 영상파일)나 특별 상영을 요청하면 세일즈팀에 토스해 커뮤니케이션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다. 포토샵을 만질 줄 알아 소셜 마케팅에 필요한 이미지 파일을 제작하는 업무도 도왔다. 영화들은 새로웠고, 내 업무는 반복적이었다.


인턴십은 주 3일 파트타임이었다. 거기다 4학년 때 들어야 하는 심화 세미나와, 미루고 미루다 결국 대학원생들과 듣게 된 영화 이론 수업을 병행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재택근무여서 출퇴근할 필요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됐다. 일하고, 밥 먹고, 수업 듣고, 과제하는 공간이 모조리 겹쳐버리니 편하게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바쁠수록 일의 능률이 오르는 사람이라, 시간을 쪼개 홈트까지 하며 뜻깊은 대학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과제까지 제출하고 졸업만 남겨둔 5월이 됐다. 원래 뉴욕대학교는 전체 졸업식을 양키 스타디움(Yankee Stadium)에서 하고, 각 학교 별 졸업식은 또 다른 장소를 대관해서 한다. 학과 별 졸업식은 학과 건물에서 조촐하게 파티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비운의 코로나 졸업반이라 입학 때부터 기대했던 스타디움 졸업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초라한 줌 졸업식에 참석하게 됐다. 전공 수업 올 A를 달성한 덕에 학과 졸업식 때 상을 받게 되었는데, Thank you! 하며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 내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재빨리 스크린 캡처를 눌렀더랬다. 참으로 디지털 세대가 아닐 수 없다.


졸업 사진을 찍겠다고 친구와 함께 뉴욕대학교의 상징색인 바이올렛 색 졸업가운을 걸치고, 평소 같으면 쳐다도 안 볼 핑크 하이힐을 신고는 티쉬(Tisch School of the Arts, 뉴욕대 예술대학) 앞을 활보했던 기억이 난다. 롱아일랜드에 사는 친구 부모님이 오셔서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셨는데, 솔직히 건진 건 몇 장 없다. 그래도 하이힐 벗어던지고 먹었던 도넛은 정말 맛있었다. 살을 쫙 빼고 환골탈태 후 최상의 컨디션으로 졸업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난 공부에 빼곤 끈기가 없다. 도넛, 맛있지. 그 가게 이름이 아마 '도넛 펍'이었을 거다. 아직 있으려나.


프로필 사진으로 쓸 만한 졸업 사진을 건지고 싶어서 결국 집을 포토존으로 꾸몄다. 벽에다 금색 반짝이 커튼을 붙이고, ‘NYU 2021’ 글자, 숫자 맞춰 금색 풍선까지 사다 놓고 말이다. (미국의 학번은 졸업예정 연도 기준이다. 난 ‘Class of 2021.’ 한국처럼 휴학이 흔하지 않아서일까?) 꽃다발을 들고 서서 뉴욕대 베스트 프렌드 한 명, 저지시티에 살던 친한 언니 한 명을 사진 기사로 불러 연사를 찍어댔다. 물론 나도 그들의 포토그래퍼가 되어줬다.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아치, 일명 맨해튼 개선문 아래서는 제대로 된 사진을 찍지 못해서 우린 결국 브루클린 브리지가 보이는 덤보까지 가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닐 때마다 주변 행인들이 축하한다고 해줬는데, 그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드디어 뭔가를 해낸 기분.


6월. 안 될 걸 알면서도 디즈니, 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소니에 무작정 지원서를 넣었다. 뉴욕에 지사를 둔 대형 영화사라면 일단 문을 두드려 보자는 심정이었다. 역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2학년때부터 그런 영화사들이 운영하는 인턴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낸 애들 중 극소수만 계약이 연장되거나, 정식으로 채용된다고 들었다. 외국인이면 그 자리를 차지하기 몇 배는 힘든 게 당연하다. 그리고 내 주변에 인턴을 한 회사에 채용된 케이스는 없었다. 졸업 학기가 되어서야 겨우 인턴십을 시작한 나에게는 더욱 불리했다. 


키노 로버는 인턴십 계약 연장 혹은 정식 채용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는 곳이었다. 팀장님이 다른 곳에 지원서를 내보라고 연결시켜 준 일이 한두 번 정도 있긴 있었다. 면접을 보기 전까지는 F-1 학생 비자 만료 직전인 데다,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미국 학위 취득 유학생 대상 취업허가제도) 신청조차 못하는 내 사정을 말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겨우 한 번 본 면접의 결과는 역시 거절이었다.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유학생에게는 시간제한이 있다. 졸업 후 90일 이내로 일을 구하지 못하면, 학생 비자에서 다른 비자로 갈아타는 루트를 찾지 못하면, 미국에서 나가야 한다. 매정했다. 6월 말이 되자 이제는 정말 길이 없겠다 싶어졌다.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하는 길 밖에 없다는 졸업반 유학생들의 우스갯소리는 어느 시점이 되면 진지해진다. (물론 난 그런 진지한 고민을 해 볼 인연을 만난 적 없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뉴욕을 맘껏 즐기고 가자는 심정으로 잠까지 줄여가며 퀸즈로, 브루클린으로, 롱아일랜드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녔다. 하루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키노 로버 직원들이 모여 대낮의 맥주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냥 하는 말이었겠지만, 팀장님이 인턴들을 향해 'You guys are the future of film!' 했던 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나는 과연 '영화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7월, 나는 서울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코로나를 탓하며, 휴학을 탓하며, 미리 알아보고, 준비하고, 악착같이 살아남아보려 시도조차 못한 못난 나를 탓하며. 그렇게 뉴욕대학교 졸업장, 그것도 '숨마쿰라우데'가 각인된 졸업장과 상장을 들고 나는 원치 않는 비행을 했다.


금의환향은 판타지였다. 그러니까, 뉴요커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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