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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Feb 28. 2023

못다 한 베를린과의 작별인사

나는 운이 좋다. 코로나가 세상을 마비시키기 직전에 야무지게 유럽을 누볐으니.


대학교 3학년(주니어, Junior) 2학기 때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 교환학생은 아니고, 뉴욕대학교 베를린 캠퍼스로부터 장학금으로 위장한 용돈을 조금 받고 스터디어웨이(study away) 학기를 가진 거다. 뉴욕대학교는 지방캠퍼스 개념으로 런던, 상하이, 피렌체, 마드리드, 프라하, 아부다비, 그리고 베를린에 캠퍼스를 운영한다. 뉴욕대학교 학생들에게 최대 두 학기 동안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데, 나름 신청서도 써서 내야 하고 인기 있는 캠퍼스는 경쟁도 치열하다. 나는 피렌체와 베를린 사이에서 고민하다 전공 수업이 더 재밌어 보이는 베를린을 택했다.


그렇게 2019년 8월 말, 베를린에 갔다. 시차적응 하면서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알아갈 요량으로 학기 시작 2주 전에 도착했다. 예상외로 베를린은 무지하게 더웠다. 기후변화로 유럽 전역에 폭염이 지속됐고, 베를린은 환경 정책이 엄격한 것과는 별개로 애초에 냉난방 시설이 잘 되어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매일 땀을 뻘뻘 흘렸다. 그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지하철. 열차마다 창을 다 열고 지하통로를 쌩쌩 달리는데, 냉방이 전혀 안되어 있어서 지하를 달리는 사우나 같았다.


그래도 학기가 시작하고는 베를린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수업이 재밌었다. 베를린 캠퍼스 교수님들은 뉴욕 캠퍼스 교수님들보다 어떻게 보면 다소 딱딱한 수업을 했는데, 나와 잘 맞았다. 주입식 교육과는 다른 느낌으로 각이 잡힌 강의 스타일에,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도 충분히 주어지니 맘에 쏙 들었다. 바이마르 시네마(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까지의 독일, 즉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제작된 영화) 수업과 20세기 독일 테아터(브레히트, 한트케 같은 주요 극작가들의 작품 위주) 수업이 가장 좋았다.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와 <M>, 페터 한트케의 언어극 <카스파>를 주제로 과제를 했는데, 지금까지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리서치 페이퍼로 남아있다.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바이마르 시네마의 표현주의(Expressionism)와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효과(Verfremdungseffekt)를 더욱 깊이 파고들었던 게 이후 전공 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또 수업을 통해 <Kuhle Wampe or Who Owns the World?> 같은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색이 짙은 정치영화를 본다거나, 도이체스 테아터(Deutsches Theater)에서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1966년작 <Persona>를 전위적으로 재해석한 연극을 본다거나 했던 것이 영화의 정치성이나 트랜스미디어 성질에 대해 탐구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작용했다.


사실 공부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베를린에 왔고, 학기 중 방학이 주어졌는데 유럽여행을 안 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남들 다 가는 데는 안 간다'는 생각으로, 파리, 런던, 암스테르담 등을 제쳐두고 부다페스트, 아테네, 그 이름도 생소한 조지아의 트빌리시, 카즈베기를 여행했다. 베를린 캠퍼스 학생들 사이에서는 암스테르담에 가 '커피숍'에서 원 없이 마리화나를 피우고, 몽롱한 채로 반 고흐 미술관을 구경한 후, 홍등가에 스트립쇼나 섹스쇼를 보러 가는 루트가 유행했는데, 나는 그걸 즐기기에는 꽤나 모범생이었다.


프라하는 학교에서 '프레지덴셜 아너스 스콜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가봤으니 패스했다. (학교가 얼마나 돈이 많으면 우수연구생 여러 명 뽑아 고급 호텔, 식당 예약해 놓고 해외 여행 시켜주더라.) 한창 클래식에 빠져있던 터라 오스트리아 빈은 잠시 들렀다. 세계 3대 필하모닉이라는 빈 필하모닉의 콘서트를 보러. 프로그램은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묵시적'과 아르보 패르트의 '벤자민 브리튼 추모 성가'였고, 지휘자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콘서트였다. 음악이 나한테 쏟아져 내려오더라. 빈은 딱 그거 하나 보러 갔던 것 같다. 빈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기차에 갑자기 연료가 떨어져 폴란드 오지에서 약 7시간 정도 조난당했던 기억은 아직 열심히 삭제 중이다.


MBTI 끝자리 P 100%의 여행에는 계획이랄 게 없다. 그래서 무조건 혼자 다니는 걸 선호한다. 쉬지도 못하고 관광객 바글바글한 곳만 보러 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건 내 여행 목적에 크게 어긋난다. 길 가다가 출출해서 들어간 식당이나 카페, 괜찮아 보이길래 들어간 갤러리나 상점. 그런 곳에서 새로운 걸 발견하는 게 여행의 묘미다. 부다페스트에서는 4일 정도 있었는데, 첫날은 에어비앤비에서 종일 맛있게 잤다. 부다페스트를 '푹 잘 잤던 도시'로 기억하게 된 이유다. 그래도 헝가리내셔널갤러리를 찾아 사진전도 보고, 리스트 페렌츠 음대에서 공연도 보고 나름 뜻깊은 여행을 했다. 아테네는 산토리니를 여행하고 온 부모님과 함께 여행했는데, 아크로폴리스가 보이는 호텔, 파르테논과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온 극장, 싱싱한 해산물 플래터, 신선한 과일과 오리지널 '그릭'요거트까지 나무랄 데 없었다. 그리스는 지금도 꼭 다시 한번 가고 싶은 나라다. (그리스는 참 요상한 영화도 많이 만든 나라인데 이건 나중에 다뤄보도록 하겠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조지아였다. 원래는 이곳을 여행할 계획이 없었는데, 아는 언니가 아르메니아-조지아 한 달 살기 여행을 하는 중이라 카즈베기 트래킹 일정에 맞춰 합류하기로 했다. 트빌리시에 도착하자마자 봉고차를 타고 거의 서너 시간을 달려 카즈베기에 도착했는데 그때 난 거의 좀비 상태였다. 그 이유는 트빌리시로 가는 환승 편을 놓쳐서 리가 공항에서 하룻밤을 꼴딱 새야 했기 때문. 자판기에서 핫초코를 계속 빼 마시며 추운 밤을 버텼다. 기차 타고 폴란드에서 조난당한 데 이어 비행기 놓쳐 라트비아에서 공항 노숙을 경험하다니. 덕분에 유리멘탈인 줄로만 알았던 내게 꽤 침착하고 담담한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시련을 만나면 오히려 차분해지더라.


아무튼 간신히 도착한 카즈베기는 나에게 잊지 못할 광경을 선물했다.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은 트래킹 코스를 따라 걷다가 백마도 보고, 설산도 보고, 구름이 지나는 길을 따라 산맥에 그림자가 생겼다 사라지는 것도 봤다. 모든 잡생각이 사라지는 공간이었다. 트래킹 후 동네 식당에서 전통주 차차와 함께 하차뿌리, 낀깔리, 시크메룰리 같은 조지아 음식을 먹었는데, 유럽에서 먹었던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묵었던 민박집에서 대접받은 샐러드나 간단한 음식들도 환상이었다. 마지막 날은 트빌리시로 돌아와 여행했는데, 카즈베기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 트빌리시는 기억도 안 난다.


그렇게 인생경험을 하고 베를린으로 돌아가 3학년 2학기의 끝을 향해 달렸다. 바이마르 시네마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베를린이여 안녕>(Goodbye to Berlin)이었는데, 참으로 시기적절했지만 파이널 과제 때문에 끝까지 읽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바이마르 공화국의 쇠퇴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그때 그 시절'의 베를린에게 작별을 고하는 소설인데, 그걸 제대로 못 읽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 베를린과의 작별인사를 다하지 못한 것 같다. 베를린에서 재밌는 수업을 들으며 학기를 보냈지만, 정작 그 도시는 제대로 즐기지 못한 느낌이 든다. 베를린에서의 기억이 다른 유럽 도시들에서의 짧지만 강렬한 기억 때문에 흐려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베를린에서 분명히 좋은 경험을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하는 마우어파크(Mauerpark)에서의 산책, 처음 경험한 비건 요리의 매력, 정갈한 큐레이팅의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Martin-Gropius-Bau), 쿨투어브라우어라이(Kulturbrauerei)의 크리스마스 마켓, 잊지 못할 훔볼트대학(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의 도서관. '나중에 박사를 하게 되면 베를린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했다. 여행으로든 공부로든 베를린은 꼭 다시 가게 될 거라고 주문을 건다. 그때 못다 한 베를린과의 작별인사도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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