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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음 Jan 25. 2021

악취

 밖을 나갈 때면 책 한 권을 챙긴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되도록이면 그렇게 하려고 한다. 지하철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크지도 무겁지도 않은 책. 어린 왕자는 얼마 전 다 읽었고 최근에는 가끔 하루키를 읽는다. 생텍쥐페리는 주기적으로 읽어야 한다. 한동안 하루키를 손에 달고 산 적도 있다. 과장 조금 보태서 하루키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겨울이 오고 나서 좋은 점이라면 주머니가 커졌다는 것이다. 올해 들어 새로 구매한 코트 주머니는 내 노트북이 딱 맞게 들어갈 만한 크기를 지녔다. 덕분에 가방을 따로 챙기지 않더라도 주머니에 책 한 권을 넣은 채 지하철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하루키의 단편집이나 수필집은 읽기가 아까워 책장에 꽂아둔 채 조금씩 꺼내 읽고, 장편은 너무 크고 두꺼워 차마 밖으로 가져가진 못한다. 다른 책을 골랐다.

 신촌은 여전히 붐볐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말의 오후 치고는 분명 적은 인파였지만 그럼에도 지하철이 빠르게 들어올 때면 점멸하듯 미끄러지는 창 너머로 빼곡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히 비쳤다. 그러나 점차 속도가 줄고 내 앞에 멈춰 선 칸에는 눈에 띄게 사람들이 적었다. 나는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지하철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나뿐 아니라 지하철에 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정체 모를 악취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자리에 앉아 얼마 있지 않은 사람들을 둘러보니 모두들 전염병 덕에 하나같이 두르고 있는 작은 가면 사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악취의 근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몸을 실은 지하철 칸의 맨 끝, 그 구석에 위치한 노약자석에 누군가 축 쳐진 채 앉아 있었다. 심하게 헝클어지고 부스스한 머리와 빛바랜 옷가지, 앉아 있다고 표현하기도 어색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그. 혹은 그녀. 한눈에 노숙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깝지 않은 곳에서도 악취가 풍겨오고 유독 이 칸에만 사람이 적은 것으로 보아 짧지 않은 시간 저곳에 머물렀던 것이 분명했다. 여하 간에 나는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 갈피를 꽂아 두었던 곳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카뮈, 이방인이었다.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감에 따라 시간이 조금씩 지나고 나는 이따금씩 책 너머로 자리를 뜨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 칸에는 전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만이 남아 있었고, 새로운 역에 도착해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다 해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옆 칸으로 자리를 옮기곤 했다.

 뫼르소가 해수욕장에서 마리 카르도나를 만나는 대목이 되자 마침내 이곳에는 나와 노숙자만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빼어 양 옆칸을 살펴보니 여전히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내가 속한 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시간과 익숙함으로 이제 악취에는 어느 정도 무뎌질 법도 하였으나 여전히 그것은 강하게 존재했고 노숙자 또한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아니 어쩌면 조금은 낮아진 자세로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 또한 내가 속한 자리에 여전히 앉아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그것은 그저 작은 존중이었다. 그저 악취 하나로 얼굴을 있는 대로 힘껏 구겨대며 도망가는 저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묵언의 메세지이기도 했다. 구린내가 나는 사람들이라면 바깥에도 차고 넘쳐난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옷가지와 각종 향기 나는 것들로 숨기고 다닐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성은 여전히 존재하며, 영혼이 있는 것이라면 존중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나는 그곳, 그 자리에 여전히 앉아 예의를 갖추고 냄새나는 영혼을 존중했다.

 뫼르소와 마리, 레몽이 버스에서 내려 해안가로 걸어갔다. 그때 지하철이 좌 우로 크게 흔들렸다. 서 있는 상태였다면 휘청거리며 몸이 흔들렸을 테지만 당장에 누워도 간섭받지 않을 만큼 쾌적한 공간에 속한 나는 크게 미동하지 않은 채 책 속에 머물렀다. 그때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마침내 그 노숙자는 딱딱한 지하철 바닥에 보기 좋게 널브러지고 말았다. 이쯤 되면 깨어날 법도 한데 여전히 누운 채로 지하철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마음에 다시금 갈피를 끼운 채 책을 덮고 천천히 그에게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냄새는 진동했고 거부감이 형체도 없이 거대함으로 함께 다가왔다. 나는 어느새 내가 몰래 경멸했던 이들과 같이 얼굴을 찌푸린 채로 손 내밀기를 주저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강하게 자리 잡은 인간성이라는 것의 숭고함이 나로 하여금 그 발걸음과 손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일으키려 했고, 비로소 그때 나는 그의 몸에 조금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를 눕힌 채 그의 엉성한 마스크를 턱 밑까지 내려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몇 초 가량이나 손가락을 대고 있었지만 그의 코에서는 더 이상 조금의 숨결도 드나들지 않고 있었다.

 결국 살을 맞대고서야 그에게 더 이상 영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하여도 내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나는 끝까지 그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나는 지금껏 무엇을 해 왔나. 여지껏 둘인 줄 알았던 공간에 나는 처음부터 홀로 머무른 채 남아 있지도 않은 영혼을 중시하며 그것이 깨지지나 않을까 마음 쓰며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마침내 당도한 곳에는 무심하게 식어버린 차가움만이 남아 있었고, 영혼이라 하는 무형의 그것은 이미 유한한 세계의 밖으로 떠난 후였다. 굶주림이 사람을 죽였나. 사회가 사람을 죽였나. 무관심이 사람을 죽였나. 죽은 후에도 그에게 모두가 무관심했고 그는 이론과 이상에 갇힌 이들마저 비웃듯 차가운 몸으로 차가운 바닥에 추락했다.

 나는 다시 한번 무의미한 손짓으로 그의 맥박을 확인한 후 몸을 일으켜 옆 칸으로, 그 옆 칸으로 향했다. 그렇게 네 칸을 이동해서야 빈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자리에 앉은 나는 이방인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을 내렸다. 계단을 오를수록 역 내에 들어선 상가에서 빵 굽는 냄새가 불어왔다. 향기로운 냄새가, 그 먹음직한 냄새가 역 전체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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