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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음 Mar 27. 2021

무색

 형태도 없이 다가오는 그것을 잡으려 너무도 많은 힘을 쏟았다. 도저히 닿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은 고개를 한참이나 돌려야 할 정도로 멀리 지난 후였다. 커피 한 모금, 그것이 목을 전부 적시고 넘어가는 것을 하나하나 느끼고 맺히는 땀방울이 눈 위로 흘러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난 후엔 우습게도 그때서야 살아있음을 느끼곤 했다.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폭력적인 태양빛의 난폭함 아래에서는 사무칠 만큼이나 겨울이 생각나다가도 이내 추위에 떨며 다시금 여름을 그리워했던 날들을 돌아볼 때면 그저 나라는 사람은 애당초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통감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때면 다시 한번 무겁게 흘러내리는 뜨거운 땀방울.


 입술 위의 감촉을 그리워할 때면 재빨리 손을 얹어 자잘한 주름 위를 훑는다. 입술이 붉은 것은 그 표면이 너무도 얇아 속내를 전부 비추기 때문이라는데, 역시 가장 솔직한 것은 입술이다. 솔직함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먼 곳에서는 독이 되어 돌아온다. 빠르게 손 끝으로 입술을 지나도 이미 온기란 간데없다. 계속해서 손을 그 위에 얹고 있는다면 피가 지나고 박동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데도 이내 멍청한 생각이라는 생각에 얼마 머물지 못한다. 입술의 온기란 간데없다.


 거대한 유리판은 있는 그대로를 비춘다. 빛을 조금도 머금지 않고 그대로 반사시켜 정확히 같은 세상을 품어 투영한다. 거울 앞에서 몸 구석구석을 짚어가며 손을 짚었다. 목 위에서부터 종아리의 뒷부분까지, 크고 작은 점들과 사연모를 흉터들. 언젠가 네가 짚어가며 물어볼 때 눈알을 굴려가며 이유를 떠올렸던 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내 몸 어느 곳도 보잘것없고 거울 앞에 선 나는 한없이 초라할 뿐이다. 몸은 기억을 가지려는데 비누의 거품이 씻어 내렸다.


 겨울 이불을 꺼낼 때는 사실 너를 생각했다. 간절할 만큼이나. 그런데 그곳에 너는 조금도 없었다. 옷장의 나프탈렌 냄새.. 그런 고상한 표현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취의 그것은 그 냉랭한 표현만큼이나 차갑게 다가왔다. 겨울 이불이 이리도 차가와서야 되는 건지. 그래서 겨울 이불의 몽글거림이나 보드라움을 뒤로하고 그것을 크게 접어 옷장 한 구석에 박아 넣을 때는 작은 아쉬움도 들지 않았다.


 결국 형태는 없었다. 분명한 두 형태가 잠시 어우러지고 다시금 빗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형태가 머물렀던, 그리고 이제는 비어 있는 그곳에는 여전히 잡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온전한 힘을 지녔다는 것이고,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머무는 공간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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