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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음 Oct 24. 2022

담배

 새벽 3시 48분, 잠에서 깬 블랑이 겨우 팔을 뻗어 담배를 집어 듭니다. 라이터는 주머니 안에 있습니다. 그가 바지를 입고 잠을 자는 이유입니다.

 불을 지피자 건너편 소파에 누운 뒤몽이 보입니다. 뒤몽은 잠에서 깼는지 마찬가지로 팔을 뻗어 작은 조명을 켭니다. 일정하지 않은 간격을 두고 깜빡이는 푸른빛의 조명입니다.

 담배 연기는 폐를 타고 흐릅니다. 다시금 입 밖으로 나온 연기는 조명 탓에 푸른빛을 냅니다. 뒤몽이 이야기합니다.

 “그 남자는 어떻게 했어?”

블랑은 대답합니다.

 “귀에 커다란 바늘들을 꽂고, 뒤꿈치를 잘라 두었어. 도망치지 못하게.”

 “양쪽 다? 도끼로?”

 “찬장에 넣어 뒀어.” 고개를 끄덕이며 블랑이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놓아줄 때도 됐잖아.”

 “걱정 마. 아직 내 귀에도 세 개나 남았어. 뒤꿈치도 언젠간 돌려줄 거야.”

블랑이 담배를 다 피우자 당연하다는 듯 뒤몽이 조명을 끕니다. 대화도 자연스레 저물었지만 새삼스레 블랑이 다시 왜 다시 양치를 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뒤몽이었습니다. 그러나 뒤몽은 묻지 않았습니다.

 

 

 당분간은 뒤몽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어느새부턴가 집을 나와 이곳저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거나 길바닥에서 잠을 자곤 했던 블랑이었지만, 날이 추워지고 낙엽도 전부 떨어지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지붕이 있는 곳에서 지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뒤몽은 그가 집 밖으로 나서게 된 이유가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거실의 소파 하나를 내어 주었다.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였다. 시간이 날 때면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술집에서 위스키와 담배를 즐겼다. 블랑은 분명 흡연자였지만 본인이 흡연자로 분류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적대심 혹은 불쾌함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블랑의 말에 따르면, 블랑은 대부분의 흡연자들을 혐오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기호에 맞게 아무렇게나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을 찌푸린 눈살 너머로 바라볼 때면 블랑은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솟는다. 그러나 그는 분명 흡연자였고 더 나아가 애연가였다. 그는 자신만의 엄격한 규칙을 지녔지만 그러한 규율 안에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담배는 분명 그에게 알맞는 기쁨과 낙을 선사했다. 그러나 말했듯이, 블랑에게는 흡연에 관한 규칙이 존재했다. 그는 절대 야외에서는 입에 담배를 물지 않았다. 그가 담배를 태우는 장소는 오로지 자신의 집 혹은 주인의 허락을 받은 타인의 집,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뒤몽과 즐겨 가는 술집이었다. 또한 그는 하루에 최대 다섯 개비만을 피웠는데 그렇기에 블랑은 자신에게 주어진 다섯 개비의 담배를 더욱 맛있고 가치 있게 피울 수 있었다. 뒤몽 또한 흡연자였고 블랑을 친구로서 사랑했기에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블랑과 같은 규율을 공유했다. 누구도 그렇게 하기로 정하거나 강요된 적 없는 것임에도 그들은 자연스레 그와 같이 행동했다.

 하지만 규율을 이행함에 있어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블랑은 다섯 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데에 있어서도 나름의 작은 규칙을 가졌고 뒤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블랑은 적당한 시간의 주기를 두고 담배를 피웠지만 뒤몽은 그저 주어진 다섯 개비의 한도를 넘기지 않는 선에서 불규칙하게 그것을 소비했다. 블랑이 뒤몽의 소파에서 머무는 첫째 날의 밤에도 뒤몽은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나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태웠고 마침 작은 조명을 켜 두고 책을 읽던 블랑은 그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낮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놓인 뒤몽의 매트리스와 블랑의 소파는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했다. 라이터를 던지듯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소리에 블랑은 다시 한번 뒤몽 쪽을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팔을 베고 누운 채 담배 한 개비를 천천히 피우는 모습을 블랑은 그저 가만히 보고 있었다.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다시금 잠을 청하려는 뒤몽을 바라보며 블랑은 책을 덮고 말했다.

 “두 사람을 사랑해 본 적 있어?”

 “어, 응? 없는 것 같은데.” 뒤몽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있어. 학교 다닐 때 옆 반 셀린과 마리를 좋아했었어.”

 “그래?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 둘 다 아무 말도 못 해보고 졸업해버렸지.”

 “그런데 어떤 셀린? 흑인?” 블랑이 물었다.

 “아니 백인. 금발에 긴 생머리.”

 “아, 그 셀린. 예뻤지.” 블랑도 기억을 돌이켜 보면 조금은 셀린을 좋아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이 예쁘고 성격도 둥글둥글해 여러모로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왜? 요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두 사람이나?” 뒤몽이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두 사람 다.”

 “멋진데. 내가 아는 사람들이야?”

 “한 명은 여잔데, 한 명은 남자야.”

뒤몽은 아주 잠시 굳은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실수라도 되는 것마냥 그는 재빨리 몸을 풀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그래? 내가 너를 아주 많이 알지는 못했었나 보네.”

블랑은 작은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거랑은 조금은 달라. 여자는 분명 이성으로 사랑하는 게 맞지만, 남자는…” 블랑은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이?” 뒤몽이 말을 대신했다.

블랑은 옅은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떤 사람들인데?” 뒤몽은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빵집 맞은편에 사는 뱅상 아저씨 알지?”

 “뱅상 씨? 그 사람은 얼마 전에 죽었잖아. 그 사람을 사랑한 거야?” 뒤몽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격양됐다.

 “아니, 그게 아니야. 뱅상 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서 자살했잖아.”

 “자살한 게 아니야. 아니, 자살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

 “무슨 말이야?”

 “뱅상 씨는 머리맡에 권총을 두고 자는 습관이 있었어. 강도에 대비하는 건지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은 뱅상 씨의 이불 가게에 쓰일 솜을 대량으로 주문한 다음 날이었어. 그런데 전날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배달이 늦어지게 된 거야. 그래서 뱅상 씨는 언제 걸려올지 모르는 배달원의 전화를 받기 위해서 전화기가 놓인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잠을 잔 거지. 평소와 같이 전화기 옆에 자신의 권총을 올려놓은 채로.”

뒤몽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테이블 위에 놓인 담뱃갑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 다시금 블랑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되고 다시 배달원이 일을 하기 시작했고, 겨울이 된 탓에 새벽은 한밤처럼 어두웠어. 뱅상 씨의 가게 앞에 도착한 배달원은 뱅상 씨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깬 뱅상 씨는 손을 더듬어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들어 자기 머리에 가져다 댔어.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 거야. 총알은 정확히 뱅상 씨의 반대편 관자놀이를 뚫고 나왔고, 뱅상 씨는 소파에 앉은 채 즉사했어.”

 “끔찍하네.” 뒤몽은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몇 번이나 으쓱대더니 잠시 뒤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뱅상 씨는 혼자 살잖아. 그렇게 자세한 이야기는 어떻게 아는 거야?”

 “사실 추측일 뿐이야. 정황상 그렇다는 거지. 그날, 뱅상 씨의 사망 시간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배달원이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전화기가 놓인 거실의 소파 위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도, 바닥에 권총이 떨어져 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이라고 생각해. 나도 마셀에게 들은 거야.”

뒤몽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셀은 뒤몽도 잘 알고 있는 경찰이었다. 뒤몽은 블랑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계속해서 담배 생각이 났다. 그러나 아직 새벽 시간인 데다가 아까 한 개비를 피운 바람에 지금 담배를 또 피운다면 오늘 하루를 단 세 개비만으로 버텨야 했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뒤몽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는 담배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입술이 마르고 눈알이 빠르게 굴렀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던 두 사람 말이야, 그 둘은 연인 사이야.” 블랑이 이야기했다.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여자의 남자도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야. 마치 네가 나를 사랑하듯이. 그녀를 사랑하기엔 그녀의 남자를 너무도 사랑해. 그녀를 사랑하려면 나는 더 이상 그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 그는 나를 죽일 만큼이나 미워하겠지. 난 그걸 버틸 수 없어. 나는 그를 너무도 사랑하는걸. 하지만 난 그 여자를 사랑해. 하루 종일 그녀 생각뿐이야. 벽에도 천장에도, 담배 연기 속에도 그녀의 얼굴이 있어. 그녀는 책 속에도 살고 물속에도 살아. 손을 펴도 그 안에 있고 주먹을 쥐어도 그 위에 있어. 고개를 돌리면 초상화의 눈처럼 나를 따라오고, 눈을 감으면 물감처럼 번졌다가 피어 올라.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해. 그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어.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그를 잃고 싶지 않아. 뒤몽,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죽을 만큼이나 괴로울 거야. 어떤 선택을 해도 나는 그 선택을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더 이상 괴롭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 어제는 담배를 여덟 개비나 피웠어. 심지어 그중 두 개비는 가로수 그늘 속에 숨어 피웠어. 길거리에서! 더 이상 어떤 규칙도 질서도 나에겐 의미가 없어.”

뒤몽은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블랑이 규율을 어겼으니 자신에게도 면죄부가 주어졌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뒤몽은 블랑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과 고통에 온전히 공감했기에 비로소 담배를 물게 된 것이었다. 뒤몽은 진심으로 괴로웠다. 블랑의 고통이 온전히 자신의 것인 듯 뒤몽 또한 고통스러워했다.

 뒤몽이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는 동안 블랑은 그저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필터 아주 가까이, 남김없이 담배를 다 피운 뒤몽은 그것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입을 열었다.

 “그 남자도 너를 사랑해?”

 “응.”

 “얼마나?”

 “아주 많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뒤몽은 잠시 질문을 멈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본 뒤몽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은 더욱이 깊어진 듯 보였다.

 “그 여자는 어때.”

 “뭐가?”

 “그 여자는 너와 그 남자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

 “나와 비슷한 마음일 거야. 둘 모두를 사랑하고, 그렇기에 더욱 둘 모두에게 상처를 주기도 미움을 받기도 싫은 거야. 하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되었을 때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 우리 둘 다 알고 있지.”

 “서로 얼마나 사랑하게 됐는데?”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가 우리를 사랑하는 만큼.”

 “전부는 아니더라도 너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몽의 목소리에서 서운함이 옅게 묻어났다. 뒤몽은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고는 라이터를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담배를 물고 있는 입술 탓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는 몰랐네. 그만큼이나 너를 사랑하고 그렇게나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

 “서운한 거야?” 블랑이 물었다.

뒤몽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라이터를 작동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몇 번 칙칙대고는 불을 만들지 못했다. 뒤몽은 꾸준히, 어쩌면 끈질기게 그것을 계속 작동시켜 기어코 불을 내어 담배에 붙이고는 연기를 뿜어냈다.

 “서운해. 조금. 괜히 질투가 나. 차라리 나랑 엘로이즈라면 모를까. 그래 차라리 우리라면 믿겠어. 나랑 엘로이즈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우리만큼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냐고.” 뒤몽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언성이 조금은 높아지고 표정이 격양되었다. 그런 뒤몽의 모습을 바라보는 블랑의 눈이 어딘가 슬퍼진 듯했다. 뒤몽은 큰 숨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너를 정말 사랑하잖아. 믿을 수가 없어.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니. 믿고 싶지도 않아. 차라리 우리 얘기라면 믿겠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추는 조명은 블랑의 눈을 한껏 더 슬퍼 보이게 만들었다. 허나 그것은 온전히 조명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블랑의 눈은 점점 많은 수분을 머금더니 이내 이슬을 맺고 차분하게 그것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 조용한 과정을 뒤몽은, 거친 숨을 내쉬고 뱉으며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과 담배 연기가 둘을 감쌌다.

 블랑은 눈물이 이미 지난 자리를 닦았다. 그리고 큰 한숨을 쉬고는 말을 꺼냈다.

 "우리도 처음부터 죽이려던 건 아니었어. 오히려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릴까 생각했어. 하지만 뱅상 씨만 사라져 준다면, 뱅상 씨가 이곳저곳에 떠벌리고 다니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인다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우리 셋은 행복할 수 있잖아. 우리가 죽을 필요도 없고, 네가 상처받을 필요도 없잖아. 그래서 뱅상 씨만 죽으면 될 것 같았어.”

뒤몽은 블랑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블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흔들리는 것은 뒤몽의 눈동자였다.

 “우리 정말 조심하고 조심했는데,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 오지랖 넓은 늙은이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서…” 블랑은 말을 잇다 말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우리를 봐 버렸다고 뒤몽.” 울음 같은 것을 잔뜩 참은 목소리였다.

 “우리라니. 누굴…” 뒤몽이 무기력하게 물었다. 그러자 블랑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나를, 엘로이즈를! 내 방에서 함께 있던 모습을! 그 무식하고 교양도 없는 새끼가 봐버렸다고. 이불 배달 따위 잘못 가져다줬으면 전화라도 한 통 주고 왔으면 좋잖아. 하다못해 노크라도 하고 들어왔으면 좋았잖아…” 블랑은 울음을 터뜨렸다.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 뒤몽은 블랑이 그렇게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뒤몽은 블랑이 했던 말들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엘로이즈라는 그 이름 하나만은 확실하게 뒤몽의 뇌리에 박혔다. 그 엘로이즈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블랑의 말들을 거슬러 올라간 뒤몽은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엘로이즈.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름. 그 엘로이즈가 블랑과 함께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것은 뱅상이었으며 블랑과 엘로이즈는 함께 그를 죽였다. 머리에 총을 쏴서. 자살로 위장시켜서. 블랑과 엘로이즈가. 함께 사람을 죽였다. 블랑과 엘로이즈가.

 수많은 생각들과 가능성들이, 그리고 불쾌하고 슬픈 예감들이 빠르게 뒤몽의 머릿속을 지났다. 뒤몽은 그것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블랑은 천천히 걸어 무너진 뒤몽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블랑을 올려다본 뒤몽은 자신의 미간을 향한 서늘한 총구를 마주했다. 블랑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뒤몽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떨리는 목소리로 뒤몽에게 물었다.

 “뒤몽, 너무 멀리 와버렸어. 나도 엘로이즈도, 너도. 아무것도 돌이킬 수가 없어. 이젠 정말 너를 죽여야 할지도 몰라. 뒤몽, 너는 나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겠어? 내가 너를 쏘지 않고 이 밤이 그저 무사히 지나간다면 뒤몽,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 줄 수 있겠어?”

뒤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배같은 숨을 쉬고는 작게 말했다.

 “총구를 들이밀고 구하는 사랑이 의미가 있어?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다 한들 그건 조금의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잖아. 네 마음이 편하기 위한 위선일 뿐이야.”

 “그래도, 그래도 그렇다고 말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 줘.”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블랑.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정말 엘로이즈를 사랑한다면 나를 쏴. 나보다도 엘로이즈를 사랑한다면.”

 “그렇지 않아. 나는 너희 모두를 사랑해.”

 “아니, 블랑.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원하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이상은 사랑이 아니야. 너는 선택해야 해. 나와 엘로이즈 중에서. 모두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네가 지금 총을 겨누고 있는 거야.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총을 네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겨. 그게 네가 보여줄 수 있는 나에 대한 사랑이야. 그렇지 않다면, 나보다도 엘로이즈를 사랑한다면 나를 죽여. 아무런 반항도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죽어 줄게. 그게 지금껏 내가 너에게 보냈던 사랑의 증거야. 나는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너를 사랑했어. 그리고 지금은 그 사랑의 크기만큼 너를 증오해. 너희를 사랑할 수 있냐고? 이제는 절대 그럴 수 없어. 그 총이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 너희를 다시 사랑할 수 없어. 그러니까 결정해 블랑.” 뒤몽은 조금도 떨고 있지 않았다. 다만 아직 증오가 되지 않은 마지막 사랑의 눈물이 그의 양쪽 눈에 깊게 고여 있었다. 블랑이 쥔 총은 이전보다도 더욱 크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의미모를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뒤몽은 듀퐁으로 말보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연기를 한껏 빨아들이고 내쉬었다. 한숨 같은 연기가 두 사람의 사이를 서서히 메웠다.

 그날 새벽, 교외 외곽에서 한 발 총성이 울렸다. 한 남성이 집 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으며, 경찰 마셀은 사건 현장에서 타살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하며 사건을 자살로 종결지었다. 폴리스 라인 바깥으로 모인 사람들과 기자들 사이에서 슬픔을 온전히 다 드러내지 못하는 한 여성이 남몰래 울음을 참고 있었다. 엘로이즈의 뒤에 선 누군가는 그 장소를 한없이 바라보다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폐를 타고 나와 공기 중으로 흘러 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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