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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음 Jul 23. 2022

동화

 언젠가부터 아파트 놀이터에는 모래밭이 없었다. 어릴 때만 해도 놀이터는 전부 모래밭이었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에 모래가 잘 없다. 학교 운동장에도 가짜 잔디들이 뿌리를 잡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바닷가에 가면 한껏 신을 냈다. 여섯 살 희는 지난주 다녀온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잊지 못했는지 돌아와서도 놀이터에 가서 모래 놀이를 했다. 다만 자기네 아파트 놀이터에는 모래 대신 우레탄뿐인 탓에 자신의 엄마를 대동해서는 이십 분이나 걸어서, 횡단보도를 여섯 개나 건너서 친구 준원이네 아파트 놀이터로 갔다. 희의 엄마는 매일같이 이십 분 너머의 놀이터에 가자는 딸아이의 무리한 요구에도 생긋 웃으며 희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그만큼이나 희를 사랑했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엄마였다. 엄마는 희를 사랑했다.

 준원이는 땅을 파고 희는 모래성을 쌓았다. 또래 아이들 중에 모래성을 쌓을 줄 아는 아이는 드물었다. 아이들이 놀 때면, 준원이가 나오지 않아 희 혼자 모래성을 쌓을 때도, 희의 엄마는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희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꼬거나 휴대폰을 하지도 않고, 작은 시집조차 읽지 않으며 희의 조그만 움직임들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는 아이의 꼬물거리는 손가락은 종종 그녀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무엇도 숨기지 않고 맑고 환한 미소를 띄우며 기뻐했다.

 준원이가 없을 때면 희는 땅도 파고 모래성도 쌓아야 했다. 이제는 얼마 없는,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양동이와 삽으로 성의 자재들을 직접 구해야 했다. 하지만 희는 언젠가부터 양동이와 삽보다도 자신의 두 손이 흙과 모래를 퍼내기에 더 좋다는 것을 알았다.

 열한 살 겨울이는 학교의 형들과 어울리며 조금씩 위험한 장난을 즐기기 시작했다. 학교의 낮은 담들을 넘어 다니고, 골목에서는 우유갑을 던져 터뜨리고는 했다. 자신의 행위가 선하지 않은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결과와 책임에는 누구보다 무지했던 겨울이었다. 지난주 아빠 몰래 서재에 들어가 책상 서랍을 마구잡이로 뒤지던 겨울은 커다란 공업용 커터칼을 손에 넣었다. 반바지 주머니에 넣으면 그 끝이 다 담기지도 않는 커다란 커터칼을. 겨울은 이유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가지고는 집 밖으로 나가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칼날을 하나씩 쪼갰다. 아빠가 무뎌진 칼날을 쪼개 버리던 것을 목격했던 겨울이었다. 다행히도 쪼개진 대부분의 칼날은 자동차 밑에 숨어들거나 화단에 떨어져 가려졌고 칼날은 아주 길지도 않아 겨울의 칼날 쪼개기는 금세 끝이 났지만 불행하게도 그중 하나는 유난히 높고 멀리 튀어 올라 얼마 남지도 않은 도심의 모래밭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끝이 나 버린 칼날 쪼개기에 싫증이 난 겨울은 대충 어디론가 주황색의 공업용 커터칼을 던져 버리고는 친구들을 만나러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그 겨울을 지나쳐 들어온 것은 희와 그녀의 엄마였다.

 준원이의 몫까지 대신해 양손으로 마구 땅을 퍼올리던 희의 손가락 끝은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찔려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성숙한 것인지 표현이 작은 것인지, 희는 소리치거나 울지도 않고 그저 딸꾹질을 하듯 작게 몸을 떨고는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섯 살 난 희는 희의 엄마가 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희가 다친 손을 들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끝을 내밀고 엄마에게 다가가면 엄마가 마음 아파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희는 엄마가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엄마가 희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래서 희는 그것을 삼키기로 했다. 자신을 다치게 한, 처음 보는 그 날카롭고 서늘한 쇠붙이를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삼키기로 했다. 여섯 살 희의 생각이란 그런 것이었다. 희는 엄마가 자신의 상처에 마음 아파할 것은 알았으나 그 쇠붙이를 삼키면 얼마나 아픈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냉큼 그것을 치켜들고는 커다랗게 벌린 입 가까이로 가져갔다.

 희의 엄마는 뒤에서 다가와 희를 안고 희의 입을 가렸다. 흙과 모래가 섞여 검붉은 피가 묻은 딸아이의 손 끝을 보았지만, 희가 놀라지 않도록 엄마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그저 희를 꼭 안아 주었다. 덕분에 희는 놀라지 않고 울지도 않고 칼날을 삼키지도 않은 채 딸꾹질을 하듯 불규칙하게 떨리는 엄마의 작은 울음을 작은 몸으로 느꼈다.

 다음 날에도 희는 손가락에 밴드를 감고 준원이와 모래 놀이를 했다. 준원이는 성실하고 안전하게 양동이와 삽을 이용해서 모래를 퍼담았다. 준원이와 희 뒤에는 여전히 그녀가 앉아 있었다. 여전히 다른 곳에 눈을 두지 않은 채로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는 몇 번이나 모래성을 무너뜨리고 또 쌓으며 종종 뒤를 돌아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그곳에 있고 또 엄마의 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언제라도 엄마가 뒤에서 다가와 자신을 안아 줄 수 있다는 것을 희는 이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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