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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타미닝 Oct 24. 2023

15년 만에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발급받았다

요즘 MZ들 사이에서 학창시절 초중고
생활기록부를 발급받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MBTI보다 정확하다고.



나는 10년 동안 생활기록부, 생기부를 쓰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과장 섞어서 말하자면 교사들은 생기부에 영혼을 갈아 넣는다. 

왜냐하면 초등 교사에게 얼마 안 남은 권한 중 거의 유일하게 남은 유효(?)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교사들 좀 살려줘라..)

유년 시절부터 어땠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표가 바로 생활기록부, 줄여서 생기부다. 

1년 동안 바라본 담임 선생님이 영혼을 갈아 넣은 '행동발달상황'.

매해 다른 담임교사들이 쓴 기록이 누적된 기록물이야말로 자신 성향을 알아보는데 아주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 10년 동안 나는 생기부를 작성하는 사람으로만 살았지만, 정작 나의 생기부는 다시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음의 뉴스 기사를 마주치게 된다.




평소 MBTI가 종교라고 여기는 나는, INFP다.

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해주는 그 척도는 숨통을 가끔 트이게 해준다.

그런 나에게 학교생활기록부 발급 열풍은 놀이터에서 혼자 땅을 파고 놀다가 500원 짜리 동전을 주운 것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정부24 홈페이지에서 5분 만에 되찾은 나의 고딩 보고서.

사진은 흐린 눈으로 봐야 한다. 안 그러면 첫 페이지에서부터 자괴감이 드니까.


거의 탑급에 가까운 성적과 수상기록이다. 그 시절 나는 진짜 공부에 혼을 갈아넣었다.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기보다는 그렇게 피말리게 공부했던 내 학창시절이 조금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쥐어짜며 공부할 필요 없어.
어차피 또 방황하거든.
그 시절을 좀 더 즐기고 추억을 더 쌓아도
세상 무너지지 않아.




대망의 진로지도상황.

고1 때는 뭣도 모르고 쓴 것 같고, 고2~고3 때의 진로희망을 보자. 

현실과 이상이 고스란히 다 있다. 감탄을 넘어 기함을 할 뻔했다. 


학생의 희망은 지금 이루지 못한 꿈이 되어 이상으로 남았고, 학부모의 희망은 현실이 되어 10년 동안 학생의 정체성이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CEO는 구체적인 목표라기보다는 한 컷의 이미지였다. 

포멀한 멋진 정장을 입고 대기업에 출근하는 임원의 이미지.(부끄럽다...) 내 눈에 그런 사람이 멋져보였었다. 전문적이고 냉철한 미래의 나.

참고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우리 집의 가세가 지하로 추락하던 시절이었다. 집안 사정도 모르고 기업의 경영인이 되겠다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있는 딸래미를 보며 부모님은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

'우리 형편에 CEO는 무슨...여자는 그저 안정적인 교사가 최고지'라는 생각을 하시며 '교사'를 꾹꾹 눌러쓰셨을 부모님을, 나는 십분 이해한다. 


학창시절에는 원하는 성적을 얻기 위해 소처럼 우직하게 앉아서 공부만 했다. 

적성과 흥미를 고민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시간에 문제 하나 더 푸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저 문제만 많이 풀었더니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나는 '정답'만 찾는 인생을 살았다. 


일단 성적을 올려서 대학을 잘 가는 게 장땡이었다.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

죽어라 눈 가리고 달리기만 했다. 그럼 다 되는 줄 알았다. 정답을 많이 맞추면 멋진 어른이 완성될 거라고 아주 큰 착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무려 15년 동안 방황을 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코스를 밟고 이뤄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일에 있어서만큼은 그다지 행복하고 즐겁지 않았다. 늘 내가 걷는 길의 옆길로 자꾸 눈을 돌렸다. 다른 길을 간 사람들이 부러웠다.

아쉽고 꿈틀거리는 마음 못 본 척 잘 덮고 그냥 살던 대로 살지,

그 마음 조심스레 꺼내놓고 하나씩 도전해볼지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10년 동안 부모님이 원하시는 인생으로 살아봤으니 남은 날들은 내가 원하는 인생으로 다시 살아보자고 말이다. 누가 뭐라고 못할 만큼 이제 다 커버린 성인이다.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니까.

눈치 보며 정답을 좇는 삶만 살다가는 죽기 전 눈을 감을 때 사무치게 후회할 것 같았다. 

나는 왜 뻔한 인생만 살았느냐고.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10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점이다.

저 위의 생기부처럼 아직도 글이 좋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을 하고 싶다. 

결국, 15년 전에 부모님이 쓰신대로 교사를 10년 하고, 그 뒤로는 내가 쓴대로 CEO가 되네.




생활기록부는 과학이다. 


 

 p.s. 여러분도 정부24에서 고등학교 생기부를 발급 받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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