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중 속에 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이 가는 길보다 5º정도 틀어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사람들을 멋지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다들 학원을 다닐 때 나는 혼자 공부했고,
학교도 다른 지역으로 나홀로 진학했다.
남들이 인생을 즐기는 20대 중반 청춘일 때, 나홀로 결혼의 길을 선택했다.
다수가 선택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만족감이 더 컸다. 대세를 따르지 않는다는 뚝심있는 내가 좋았다.
그런데 교대-교사의 루트는 내가 밟았던 것과는 영 다른 느낌이었다.
제도권의 교육 공간 안에서는 색다른 시도가 눈밖에 날 때가 많다. 있는 듯 없는 듯하게 1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곳. 새로운 것을 하면 할수록 일이 더 생기니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있다 퇴근하는 게 제일 좋은 포지션인 직장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 보니 큰길을 탔고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따라 가는 듯한 인생이었다.
불안함은 크게 없지만 기대감도 없는 삶이랄까. 가보지 않은 길도 가고 샛길로도 들어서보고 도로변의 가게에도 가봐야 살맛이 날 것 같은데 말이다. 누군가는 세상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다 알아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2년 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셔서 명예퇴직을 하신 선배 선생님이 계셨다. 뇌 쪽에 문제가 생기셔서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전원 주택 생활을 시작하시기로 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 교실에서 수십 가지의 초록초록한 화분을 정성스럽게 기르시던 선생님이셨다. 나는 아쉽다는 말씀과 함께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드렸다. 그리고 선생님의 전원 생활이 부럽다고도. 그 분은 충혈되신 눈으로 나즈막히 말씀하셨다.
안 맞는 일을 너무 오래했지 뭐야...
영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는 것도 생각해봐.
뒷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는 순간이었다.
교직이 힘들다고 하면, 그동안 '그래도 여기만한 데 없어....'라고 하는 말들이 어김없이 되돌아왔던 날들이 많았다. (요즘은 아닌 경우가 많겠지만) 그러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나만 별 나서, 나만 세상을 몰라서. 나만 뜬구름 잡으니까.
8년을 교직에 있으면서 같은 동료선생님이 그만두어도 괜찮다고 해주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를 속이며 10년, 20년, 30년을 꾹꾹 버티면 어쩌면 그분처럼 속병이 날 수도 있겠구나.
저렇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순간이 많을 수도 있겠구나.
그 때부터였을까.
직장에서 두 발이 한 뼘쯤 허공에 떠 있게 되었다. 언제든 트랙 밖을 향하는 삶을 꿈꾸며.
트랙을 벗어나는 삶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보았다.
트랙을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를 요구한다. 주위의 저항도 이겨내야 하지만, 하던 대로 해도 되는 편안함을 벗어던진다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트랙 밖을 향하는 사람들에게서 후광을 본다. 나만 볼 수 있는 후광이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묻는다.
이야기는 어쩌면 그런 무모함들이 이어져서 만들어지는 것.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쩐지 선뜻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원래 이야기는 약점으로 만들어 내는 거다.
-김윤리 시 '삼켰다'-
다수가 가지 않은 길은 돌부리도 많고 잡풀도 많다. 그래서 영 인기가 없다. 하지만 나는 100명이 다녀간 쭉 뻗은 길에서 눈에 띄지 않는 1명이 되는 것보다 남들이 꺼려하는 거친 길을 가보는 단 1명이 더 매력적이다.
뻔하게 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
달리고 있을 때는,
트랙 위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일에서 조금 떨어져야만 나 자신,
나의 일하는 모습,
그리고 내가 일에서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요.
-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中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고 오늘도 발버둥을 쳐 본다.
뻔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