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그저 좋은 사람>, <축복받은 집>
라히리는 지문조차 남기지 않고 인물을 빚어낸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뿐 아니라
서사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이 커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듯하다.
by. 뉴욕 타임스 북리뷰
줌파 라히리를 알게 된 것은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통해서였습니다.
움파룸파가 생각나는 희한한 이름이었던, '줌파 라히리'.
라히리는 인도 벵골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두 살 때부터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살았다. 그녀는 인도 이민자 가족 구성원의 갈등이나 젊은 인도계 미국인의 정체성 찾기를 다룬 소설을 주로 써왔다. 오늘의 미국 문학에서 '이민자(移民者) 소설'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그녀의 장편 '저지대'도 인도와 미국이란 서로 다른 세계를 오가며 전개되는 소설이다. 라히리는 오바마가 '저지대'를 샀다는 소식을 듣곤 "케냐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오바마는 나처럼 미국을 두 겹의 시선으로 본다"고 했다. - '북스' 화제의 신간 기사 中
정체성이 뚜렷하진 않은 그녀의 소설은
낯선 곳에 여행 가서 우연히 먹게 된 퓨전 요리와 같은 오묘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미국 작가가 쓴 소설이라고 하기엔
이방인이 가진 근원적 슬픔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슬픔이나 상실감이 결코 낯설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낯선 듯하다가도 곱씹어보면 내 것인 양 친숙했고
그것은 곧 '공감'이라는 공통분모를 어김없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녀의 소설은 두 가지의 해시태그를 꼭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 #가족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이민자로 설정됩니다.
그래서 배경에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하고
물 속에서 부유하는 앙금처럼 처량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공존합니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가족, 친구, 연인 등
모든 인간관계에 내재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을
섬뜩하게 드러냄으로써 사랑보다 더 깊은 관계의 심해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은 결국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라
‘그럼에도 뜨겁게 사랑하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이토록 아프지만, 이토록 불안하지만,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야말로 우리 생애 최고의 축복이니까.
by. 정여울(문학평론가)
우리의 식사와 우리의 행동은 이미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피르자다 씨가 정말로 속한 곳의 뒤늦은 허상일 뿐이었다. -<축복받은 집> 중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그녀의 묘사는 서늘할 정도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습니다.
계량한 듯 세밀하게 조절해낸 그녀만의 거리감이
인간 본연의 감정과 가족 관계가 지닌 필연적 아슬함을
명징 하게 그려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남편과 이제 막 울기 시작한 아이와 그날 아침 쪼개져 열려버린 자기 가족을 생각했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이 두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 <그저 좋은 사람> 중
가을 날씨처럼 서늘한 긴장감 위에서 가늘게 떨리는
감정선을 느끼고 싶다면,
가족 안에서 미묘한 갈등이 감지되는 것 같다면,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집어 들어보시길.